부록

개혁파교회의 성경적 예배와 찬양

 

Coin of the Bar Kokhba revolt(132–136 CE). Bible Lands Museum, Jerusalem, 5651. Drawn from SAM no. 133–134.

개혁파교회의 성경적 예배와 찬양

서론

1. 문제 제기

오늘날 한국교회 교회음악을 살펴보면 잘못된 복음성가가 깊이 침투해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날 교회음악은 언제나 세속 음악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쫓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교회음악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야 할 시점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은 바로 그분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찬양은 단지 예배의 보조역할에 머문다는 인식은 없어져야 한다. 그만큼 찬양은 예배에서 중요한 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떤 것인지 신중하고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2. 연구의 목적과 범위

(1)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일어서서 응답하고 그 하나님 찬양순서가 곧 예배 중 찬송이다.1)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식 속에서 많은 방법을 통해- 인사나 환영, 용서와 확신, 교훈과 축도 속에서 – 다가오듯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은 여러 상이한 분위기와 음조를 띠는데 첫 번째 음조는 찬양(praise)이나 칭송(ador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실 그대로 찬양하며 칭송하기 때문에 이 같은 예배는 ‘순전한(pure)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하나님을 아는 건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의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예배는 문자 그대로 참되고 적법한 예배이다. 왜냐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송함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의 중심성을 탈피하고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존경심을 나타내며 드리기 때문이다.

(2) 찬양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이다. 이에 대한 예배자 응답은 찬양, 기도, 감사이다. 인간 편에서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찬양이다. 찬양은 교회음악의 핵심이며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보조수단이 아니라 중심이며 생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우리의 구원문제를 말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했다.(엡 1:3) 우리의 구원이 너무 크고 보배로우며 모든 복을 다 주셨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예배에 있어 찬송의 위치는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교역자나 성도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찬송은 구원에 대한 자기의 마음, 감격, 감동을 실어서 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성도의 찬송이 성심, 성의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주일 낮 예배 이외 공적 예배에서의 찬송은 거의 무관심에 가까우며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순서에 따라 의미 없이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3) 찬송은 예배하는 자의 의무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를 우리가 알고 이 은혜를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또 찬송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만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찬송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찬송을 받으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뿐이기에 찬송할 때도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자기중심 이거나 자기도취에 빠져서 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회중 찬송은 매우 중요하다.

19세기 이후 미국 남부와 서부에서부터 시작된 대전도 집회에 ‘부흥 찬송’과 ‘복음 찬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부터는 대전도 집회, 신오순절 계통의 교회, 세속화되어가는 교회들이 소위 현대 복음송(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백인 컨츄리뮤직(Country Music), 흑인 블루스와 째즈(Blues and Zazz), 사탄의 음악인 록 뮤직(Rock Music) 등이 세상의 타락된 문화인데도 전도의 상황화와 찬송의 토착화라는 미명하에 교회에 계속 침투해 들어와 교회를 타락시켰으며 지금도 계속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이처럼 감동이 없는 찬양, 마음에 없는 가사 읽기, 군중심리로 따라 부르기 등의 찬양하는 사람은 많으나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실함, 성실함, 정직함으로 성경대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사람은 적다. 성도의 찬양은 음악 차원이 아니라 영적 차원이다. 찬양은 관념이나 기술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드리는 것이다.

시편 69편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다. 찬양은 최선으로 드리는 제물이다. 성실한 찬양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예배에서의 찬송의 위치(중요성)와 오늘날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현대교회 음악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하고자 한다.

3. 연구자료 및 방법

먼저 예배에 대한 모든 걸 성경적으로 정리해 보고 예배신학을 바로 정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신학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과 개혁교회의 예배에 있어 예배신학과 예배의 본질, 예배의 요소, 예배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찬양’과 ‘찬송가’에 대한 역사와 성경적 이해를 살펴보고 찬송가의 문제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그리고 예배 시 찬양의 위치와 중요성, 찬양 행위에 있어서 어떠해야 할 것을 심도 있게 조명해 보고자 하며 끝으로 현대 교회음악(CCM 중심)의 정의와 여러 가지 야기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Ⅰ장   예배

1. 예배신학의 성격

예배신학은 예배에 대한 모든 것을 신학적 교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예배신학의 수립은 예배를 예배 되게 하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배의 근거 및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2)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예배는 이 계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1) 예배신학은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근거한다. 

메이첸(J.G. Machen, 1881-1937) 박사는 예배의 신학적 정립에 우선하는 것은 역시 성경적인 바른 신관(神觀)과 바른 인간관(人間觀)이 선행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첫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둘째로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예비지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인간에 대한 교리’는 복음의 위대한 두 전제(前提)가 된다.”3)          

하나님은 영광과 예배받으시는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에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최고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칼빈주의가 항상 하나님과 인간과 바른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예배의 신학 역시 무한(無限)하시고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같이 먼저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을 인정하지 않고는 참된 예배가 성립될 수 없고 그의 영원성(永遠性)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를 예배할 수 없다.4)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데 계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임재하여 인간과 교통하시며 예배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5)

(2) 예배신학의 근거는 하나님 중심이다. 

칼빈주의 실천신학의 대가 카이퍼(R.B. Kuiper)는 회중 예배의 본질(The essence of Corporate Worship)로서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with God), ‘하나님에 의한’(of God), ‘하나님께’(unto God)라고 한 말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6) 그러므로 칼빈주의 주장처럼 ‘하나님 중심’ 사상의 신앙을 가진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고 또 삶에 있어 ‘하나님 중심’ 사상을 전제로 할 때만이 진정한 예배신학이 성립될 수 있다.7) 또 그러한 예배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이 전제되어야 한다.8)

(3) 예배신학의 근거는 또 예수 그리스도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생애 그 자체가 예배며 기독교 예배의 기독론적 근거는 그의 생애를 통해 이룩하신 완전한 예배의 행동인 예수님 직무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사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예배의 신학적 주제가 되어야 한다.9)

(4) 성령의 역사는 예배신학의 전제이다.

베인호프(J. Veenhof)는 성령론을 교의학에 속한 별개 과목으로 보려고 하기보다는 신학의 중심과제로 다뤄져야 할 과목으로 보았다. 바른 예배신학의 수립을 위해서는 올바른 성령론이 정립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성령론이 바로 정립되지 못하면 그 예배는 신비주의, 감상주의, 샤머니즘으로 변질이 될 우려가 있다.10)

이같이 우리는 예배 신학의 성격과 전제를 살펴볼 때 오늘날 무엇보다 먼저 예배신학의 정립이 얼마나 절실하며 긴박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2. 예배신학과 성경신학

예배신학을 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또한 무엇보다 성경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배학은 어떤 현상학이나 혹은 심미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다. 예배학은 성경신학의 접근으로 되어질 성질의 것이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는 말하기를 선지자들에 의해 지적된 죄악의 가장 큰 근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에 대한 문제였다고 했다.11) 

성도의 예배는 성경을 통해 명백히 제시된 신앙의 핵심적인 사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도록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신앙과 항상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12) 따라서 신구약 성경은 언제나 예배 문제에 관한 주요 원천이요 최종 근거이다. 즉 기독교 예배는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13) 그러므로 하나님 예배에 있어 하나님이 명하신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첨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 내용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14)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이 신앙과 예배와는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또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 생활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을 신앙의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핵심적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구심점으로 하여 신앙의 유대를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속박과 압제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모세에게 출애굽의 임무를 맡기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낸 다음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15)라고 하신 말씀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 정도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원의 주체자인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변했다. 시내 산에서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로 더불어 언약(Covenant) 관계에 들어가는 정도뿐 아니고 성막(the tabernacle)을 세우고 하나님께 번제 드리며 섬기게 될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 언약신앙은 곧 예배에 직접 투영되었고 예배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구약의 중요한 흐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예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16)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느냐 하는 신앙고백이다. 예배는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스라엘의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예배의 중요한 또 다른 한 방면은 예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17) 제도적 예배뿐 아니고 삶 전체의 예배가 또 강조되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것은 타락한 의식적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18) 

또 초대교회의 예배가 지니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보면 즉 설교와 성만찬 등이 하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기도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 데 송영(Adoration), 고백(Confession), 기원(Invocation), 감사(Thanks), 탄원(Supplication)과 중재(Intercession)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기독교 예배의 원리와 방법은 처음부터 성경에 기록된 대로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과 계시록에도 기독교 예배의 구조를 암시하는 내용은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예배신학 정립을 위한 성경신학의 접근방법이 필수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3. 개혁교회의 예배신학

어떤 의미에 있어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기독교의 예배를 본래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전(聖禮典)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예배 생활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강조를 출발점으로 하였다. 특히 칼빈(John Calvin)의 말한 “교회의 어떠한 집회도 말씀, 기도, 성만찬 그리고 헌금을 드리는 일이 없이는 열릴 수 없다.”19)고 한 것은 개혁파교회 예배신학의 핵심을 언급한 원리이다.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이다.”20)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과 하나님께 나오는 연약한 인간의 만남이다.21)

예배와 개혁신학에 대해서 정일웅 교수는 개혁신학이 말하는 예배는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을 중심 주제로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 그리고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찬양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높이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 드림을 예배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는 역시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과 새 언약에 근거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며 개혁신학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예배신학의 근본 원리로 삼고 있다.”22)

코튼은 인간적인 고안물로 오염된 예배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예배만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내적이거나 외적이며 도덕적이거나 의식적인 모든 예배의 직접적이고 유일하며 충족한 법칙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방침에 의하여 입증된다. 그리고 모든 개신교 목사들의 일반적인 신앙고백에 의하여 증명된다.”23) 코튼은 성경에 기초한 예배를 드릴 걸 주장하면서 영국 국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모든 비성경적 예배의식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1) 개혁교회 예배의 본질

  ① 하나님 임재(with God)24)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하셨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만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위엄과 경외심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카이퍼(R.B. Kuiper)는 회중 예배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가운데 하나님께 봉헌되기 때문에 두 가지 관계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그것은 하향적인 관계로서 성경을 봉독하고 말씀을 선포하며 축복기도를 하는 순서를 통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배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상향적인 관계로써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헌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응답하게 된다. 이 모든 예배순서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응답하기도 한다.”25)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몇몇 진리들을 알 만큼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구원의 계시를 전부 알 정도로 충분한 지식은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예배하고 있었으나 그들 자신이 예배하는 것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이고 정열적이고 흥분되어있고 충성된 것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올바른 내용이 없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진리로 예배하지 않았다.26) 사마리아인과 정반대인 유대인에 대해서 죤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구약의 39권 모두를 받아들이며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전체 계시가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마태복음 6:1-8을 읽어보면 그들의 예배는 차갑고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배 동작을 모두 행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갖고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다.”27)      

유대인들은 예배에 관한 모든 정확한 자료들을 갖고 있었으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올바른 예배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다. 예수님 말씀은 참된 예배에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에 의힌(of God)

예배는 인간으로부터 기원 된 형식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처음부터 종교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神)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서 자연 발생으로 생겨 난 것이 아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열망도 결국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저버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렸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려고 했으나 성경은 ‘주(여호와)만이 하나님’(시 86:10)이라고 못 박았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으시지 않는 이상 아무리 인간이 찾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끝내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28) 왜냐하면 예배의 모든 행위도 하나님께서 먼저 일깨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그만을 경배하고 순종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의 예배 행위도 아무런 뜻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크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29)

  ⓷ 오직 하나님께(unto God)

오늘날 많은 예배가 대단히 잘못된 예배 목적을 갖고 드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배자의 소원 성취나 어떤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니라 예배를 수단으로 하여 결국에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의 목적이 인간 자신이 될 때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자신의 위안과 만족을 위한 예배라면 대개는 훌륭한 쇼나 우스운 대화를 듣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며 설교자는 이런 경향을 만족시키려 하다가 예배 신학이 없이 잘못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예배는 자기의 예배이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일 수가 없다.    

이렇게 예배가 잘못될 위험성은 항상 있다. 나중 되어야 할 것이 먼저 온다든지 먼저 와야 할 것이 나중 오게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배 또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항상 바른 예배신학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교회 생활에 성도의 교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가 에배의 궁극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예배)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배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구원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한 방편임을 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 이 일이 정확히 수행될 때만이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예배를 통해 축복받는 게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예배의 축복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다.30)

또 진정한 예배는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이 제사 드렸던 ‘이산’(수가성 서쪽 그리심 산)이나 유대인들이 광야 회막에서 시작하여 솔로몬 성전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처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의 중심이 더 중요하다고 조영엽 박사는 말한다.

“진정한 예배는 기도와 찬양, 신앙고백, 뜻과 정성이 담긴 헌신, 감사의 예물 등을 통하여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새 생명의 활동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봉사하는 행위이다. 참된 예배는 마음 중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외적 행위로 나타난다.”31)

(2) 개혁교회 예배의 요소

개혁교회 예배요소는 말씀 선포, 기도, 성례전, 헌금, 찬송 등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말씀 선포

개혁파교회의 첫째 예배요소는 말씀 선포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전승 속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못하고 기껏해야 하찮은 주변 이야기나 종교 윤리적 문제로 취급하는 정도였다.32) 이에 반해 개혁자들은 올바로 성경 가르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자각했다. 개혁교회가 강력했던 이유는 성경에 근거한 교리가 설교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을 가리켜 ‘말씀의 종으로서의 칼빈’(Calvijn als Bedienaar des Woords)으로 묘사한 것은 종교개혁의 성격을 잘 말한다. 또 다우마(J. Douma)가 ‘설교 없이 구원 없다’(Zonder de Prediking geen heil)라고 한 말은 칼빈의 설교를 통해 개혁교회에서 설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33)

이같이 종교개혁은 바로 설교의 회복이요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교개혁 당시 설교운동은 성경의 재발견과 성경 번역의 새로운 시도운동이었다. 약 10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에 의해 평신도들에게는 가려졌던 성경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밝히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전파된 말씀을 성경과 거의 동일시했기 때문에 성경 봉독과 설교는 항상 포괄적으로 그저 ‘말씀’으로 통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과 그것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의 ‘예배의식’이었다. 성경을 읽은 후에는 바로 그 말씀을 근거로 한 설교를 했다.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설교형식은 주해 설교를 틀로 삼았는데 오늘날은 이를 케리그마적 설교(Kerygmatic Preaching)라 하기도 한다.34) 

신약에서 교회 집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언제나 설교와 가르침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라일(John C. Ryle)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깨우치고 성도들을 인도하며 세우시는 데 있어 주요한 도구가 된다. 나는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 마지막 구절에서 특별히 그가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고 그들에게 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가 경시되거나 구석으로 밀리는 그런 예배를 성경에 기초를 둔 것이라거나 하나님의 복을 받는 예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20)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즉 설교를 경멸하는 것은 영적인 신앙이 쇠약해지는 확실한 표지다.”35)        

설교는 예배순서의 절정을 차지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13에서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했다. 읽는 것은 ‘성경 봉독’이요, 가르치는 것은 ‘교리교육’이요, 권면하는 것은 ‘설교’다. 즉 성경 봉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읽음을(출 24:7, 신  31:11, 수 8:35, 왕하 23:2, 느 8:7,8, 눅 4:16, 행전 15:21, 골 4:16, 살전 5:27), 교육은 신앙의 진리를 문답식으로 가르치는 것을(딤전 1:10, 4:1,6,16, 5:17, 6:1), 설교는 성경 주해와 적용을 포함한 말씀을 뜻한다.36)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해석이며 증거이다. 설교는 영속적이며 종말론적인 복음이 가장 분명하게 이 시대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먼저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와 세상에 대한 통찰력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설교는 성경의 근원적인 계시와 구원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다른 한편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오늘날 청취자에게 이르도록 하는 활동 능력을 증명한다. 설교자는 그 때문에 옛이야기를 새롭게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즉 우리 시대와 문화범주의 언어가 그리스도의 일 가운데 수용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회중이 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즉 말씀의 청취가 말씀에 대한 순종이 되도록 도움 주기를 원한다.(약 1:22-27)37)

 ② 기도

개혁파교회의 두 번째 예배요소는 기도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소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며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감사, 자복, 간구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말로 하는 것과 노래로 하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특히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더 열렬하고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찬양할 수 있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할 수 있는 위대한 힘과 활력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찬송을 단순히 심미적(審美的)으로나 흥미를 느끼게만 하는 음악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기도 신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져 그의 영광을 높이는 일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한 찬양과 감사로서의 영광의 찬양이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바로 이러한 기도의 예를 볼 수 있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여섯 가지의 간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의 것은 주의 이름과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룸에 대한 기도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 인간의 필요를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예배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38)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드린 기도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Christ)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사장을 통해 희생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성도 각자가 자신을 산 제물로 삼아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direct communication)을 하게 되었다. 기도 끝에는 유대인들이 아멘(Amen) 한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도 아멘으로 화답했다.39)

  성례전

개혁파교회의 셋째 예배요소는 성례전(聖禮典, 세례와 성찬)이다. 칼빈은 설교와 성례전의 조화를 위해 힘썼다. 그래서 그는 스트라스버그에서 매월 1회 그리고 그 후 제네바에서는 1년에 3-4회 정도로 예배 시에 성만찬을 했다. 성만찬 의미 해석에 칼빈은 루터(Luther)가 너무 실재적이고 쯔윙글리(Zwingli)가 너무 비실재적이고 상징적으로 봄으로 칼빈은 성만찬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영적 임재설이라는 중간 입장이다. 성만찬의 횟수가 줄었으나 칼빈이 설교와 성례전의 올바른 균형을 수립하는 데는 이바지했다. 그래서 이 균형의 원리가 예배 개혁의 원리로 재평가되고 예배학자들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40)

성찬(聖餐)은 떡과 잔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성도가 한 몸과 지체의 관계로 연합함을 경험하게 하는 신비로운 의식이다. 이는 주님이 제정하신 것으로 주의 만찬이라고도 한다. 주의 만찬은 원래 초대교회의 예배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유발하며 또 믿음을 강화하는 수단이라면 성찬은 주님과의 교통과 연합을 나타내는 예배의 실제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말씀이 지적인 이해의 접근이 중심이라면 성찬은 정서적이며 신비적인 그러면서 신앙의 실제적이며 동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말씀의 종교개혁 의의를 지나치게 설교 하나에만 국한 시킴으로써 예전에서 말씀과 성찬의 조화가 약화 되는 딜레마를 안게 되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예전과 그 가운데 장로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문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41)

우리는 이같이 예배요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기본적인 것이 바로 성찬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말씀과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칼빈은 성례전이 우리의 전 신앙생활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성례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 안에 우리는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은사를 즐기게 된다.”42)라고 하였다.

칼빈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과거의 사건을 상기하나 현재 그리스도가 물적 표식 안에 영적으로 존재해서 신자의 믿음을 굳게 한다는 점과 신자가 성찬에 참여해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 것이 단순한 신앙적 행동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걸 체험하고 감화를 받는다고 한다. 곧 그리스도가 물질 안에 임재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성찬에 임재하심으로 신자와 신령한 교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마음에서 오는 기념행사가 아니라 현재 신자가 축복받는 은혜의 방편(方便)으로 믿었다.43)         

그러므로 칼빈은 “성찬은 자주 가지는 게 좋으며 매주 한 번씩 갖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44)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유지하고 자극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을 선포하고 한 그리스도 몸에 있는 것과 같이 서로 한 몸 되어 사랑의 생활을 계속하도록 자주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이다.45)

  ④ 헌금

개혁파교회 넷째 예배요소는 헌금이다. 초대교회의 헌금은 조직적이며 규칙적이었다. 헌금은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종적 응답의 구체적 표현의 기획이다. 헌금은 감사와 헌신의 표로서 예배에 있어 교회 사역이다.46) 헌금은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순서이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베푸시는 은혜를 비롯해 범사에 보호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삶의 의무다.(살전 5:18) 

예배와 관련하여 감사의 방식은 준비한 헌금을 예배 중에 수집할 수 있으며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마련해 예배에 임할 때 그곳에 넣게 할 수도 있다. 후자의 방식은 예배 시간상 수집하는 시간 절약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헌금 감사기도는 목사가 해야 하며 헌금자들을 거명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주실 걸 비는 기도는 삼가야 한다.

봉헌(奉獻) 순서는 원래 고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 예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헌신적인 사랑의 제물과의 연합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제물과 참여자 자신의 헌신과의 관계에서 성찬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회중은 성찬에 올 때 먼저 빵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과 초 그 외 자연의 생산품(농산물) 등을 가져와 제단에 내어놓게 되었다.

그런 봉헌의 순서가 9세기경부터 여러 가지로 발전했는데 신자들이 가져온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예배 중에 드리는 순서로 등장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성만찬의 떡과 잔이 거룩한 물질로의 변화를 위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 순서로 바뀌게 되었다. 전자는 11세기경에 와서는 돈을 대신하여 예배 중에 드리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말씀 중심 예배에서 감사의 제물 또는 사랑의 제물로서 포기할 수 없는 개신교 예배 중의 한 요소가 된 것이다.47)          

개신교의 예배는 단번에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 헌금 순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속죄 행위를 위한 희생 제물 의미에서 드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은혜 감사의 표로서 마음을 물질로 표현하는 것은 개신교 예배의 봉헌 순서의 한 의미이다.48)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물질을 모아 성도들의 필요한 곳에 사용토록 하는 순서를 주일에 이행할 것을 명하고 있다.(고전 16:1,2) 그리고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해 물질을 바치는 문제의 소중한 원칙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 헌금의 순서에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도록 부탁하면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는 해석과 함께 인간들의 단순한 구제 행위로써 끝나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바쳐져야 할 성도들의 당연한 봉헌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바울의 사상은 바로 초대교회의 예전 가운데 봉헌의 순서로써 빈궁한 성도들을 위해 물질을 드리는 순서를 먼저 가졌고 이어서 성례전을 위한 성물을 바치는 예전을 이루었다.49)

오늘의 개신교 예배 가운데 봉헌의 예전은 두 가지의 역사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는 순서로써 지켜져야 한다. 그 첫째는 구약의 맥락을 이어받아 희생의 예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들의 희생적인 신앙과 정성과 마음이 모아진 것이어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고 즐길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적 행위가 담긴 예물로 제단에 바치는 것이 참된 봉헌의 정신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확장하기 위해 그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바치는 마음과 물질의 봉헌이어야 한다. 초대교회처럼 가난한 성도들의 생활을 돕는 일이나 오늘의 선교 사업을 위함이든지 성전 건축이나 교회운영을 위한 것이든지 어느 곳에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도록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워드 라이스(Howard Rice) 예배학 교수는 “봉헌의 의미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의미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오늘의 삶을 감사하고 주인 되신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는 감사와 순종의 신앙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요구된다.50)

그러나 오늘날 예배 중 봉헌하는 마음과 봉헌 기도 가운데 그릇된 관념이 굳어져 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축복’이라는 응보적(應報的) 관념이 오늘의 교회에 너무 편만해 있는 것이다. 즉 감사의 응답으로 바쳐진 예물을 앞에 놓고 복을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모습을 우리의 봉헌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근본 책임은 바치는 성도들보다는 그 예물을 앞에 놓고 축복기도를 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제단의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 복을 기원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신약에 나타난 예배나 개혁자들의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복을 달라는 요청을 동시에 행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감사와 찬양과 함께 즐겁게 바치는 신앙의 표현이었으며 당연한 의무의 이행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목사가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라는 투기심까지 조장시키는 선동적 기도하는가 하면 복을 받으려는 방편의 하나로 또 좀 더 많은 헌금을 유도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51)

찬송

  개혁파교회 다섯째 예배요소는 찬송이다. 예배에서의 노래는 처음부터 기독교 예배의 구성 요소였다. 그것은 기도처럼 원천적으로 하나님 구원의 행위에 대한 교회의 감사와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의 대답이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교회의 찬양에 작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용기를 그의 아들을 통해 기쁨이 되게 해 주셨다. 왜냐면 그가 우리를 위해 죄와 죽음과 사단의 종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진지하게 믿는 자는 다른 이들이 듣고 믿음에 이르도록 기쁨으로 그것에 대하여 노래해야 한다.52)

“교회의 찬송은 노래 부름과 말함을 통해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1545년 Babstschen 찬송가 머리말에서, WA 35, 477) 이 말은 루터가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에게 찬송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더 해 준다. 페터 브루너도 찬송을 말씀 전파의 간접적인 형태라고 했다.(Gottesdienst, 205)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전파로서 교회의 노래는 본질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 또 교회의 노래는 그것이 살아계신 주님에 대한 교회 신앙의 표현이라면 역시 그것은 신앙의 노래이며 신앙고백과도 연결이 된다.53)

찬송은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신앙적 표현을 음(노래)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노래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시, 찬미,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권고했다.(엡 5:19)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분부하신 말씀과 같이 찬송을 강조하였다.(골 3:16)   

시(詩)는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며 그리고 시편은 악기를 동반한 노래(song with instrumental accompaniment), 찬미는 찬송, 신령한 노래는 성경적 복음송을 가리킨다. 고린도 교회 또한 찬송하는 교회였다.(고전 14:26)54)

(3) 개혁교회 예배의 특성

  겸손

개혁파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긴다. 이런 고귀한 예배의 특성은 첫째 겸손한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만나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하게 된다. 예배자는 마땅히 중보자(仲保者, The Mediator)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55)

  ② 한마(한 신앙고백)

개혁주의 예배 두 번째 특성은 ‘합심의(It is United) 예배’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모인 자들 개개인이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56) 같은 찬송, 같은 기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그리고 모두가 동일한 은총을 받는다. 또 한 성령의 지배 아래 모든 순서를 수행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참된 교회의 예배는 흩어져 있는 지(支)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57)

  ⓷ 영적 예배              

개혁교회 예배 세 번째 특성은 ‘영적 예배’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고 하셨다.58) 

이는 회중 예배의 형식을 배제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교회의 영광스러운 예배 방식에 대해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교회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예배의 특정한 형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높이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가 진정 누구신지 인식하기 때문이다.59)

  ④ 자유로움

넷째는 예배의 자유로움(It is Free)인데 신령한 예배일수록 자발성(自發性)이 뚜렷하다.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일이 곧 노예(奴隸)요 반면에 순종이 곧 참된 자유이다.

자유로운 예배는 예배의식이 하나님 말씀이 정하여준 방법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하며 인간의 법규와 전통은 도리어 속박되어야 한다. 예배가 자유로워야 한다면 예배를 인도하는 자 역시 하나님의 법대로 세워야 함이 마땅하다. 외부 압력이나 충동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자신의 양심을 억누르는 사람은 계명을 지켰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60)

  ⑤ 아름다움

다섯째는 아름다운(It is Beautiful) 예배이다. 물론 이 말은 예배 장소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술적 가치를 위한 예배당 예술성은 배제되어야 하며 예배를 흐리게 하는 모든 장식이나 기구도 금지되어야 한다. 예배의 내용이 성경적이며 형식과 순서가 ‘적당하게 되고 질서대로’61) 수행될 때만이 회중 예배는 아름다움을 지닌다. 한마디로 예배의 아름다움이란 성스러움을 반영하는 일이다.62)

⑥ 즐거움                

끝으로 즐거운(It is Festive) 예배다. “회중 예배는 하나의 축제처럼 되어야 한다.”(Corporate worship should be a festive occasion)63)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예배에 죄의 고백과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이는 성도의 기쁨의 동기이기도 하다. 고로 자기 죄에 대한 증오의 기본음에서 시작된 노래는 위대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으로 끝을 맺게 된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다.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성도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는 벌써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64)

지금까지 개혁파교회 예배의 특성 중 핵심적 내용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혼란 속에 살고 있다. 예배가 의식적(儀式的) 감정주의, 개인적인 감상주의, 편협한 예배 등에 치우치므로 예배가 인간 중심의 세속화 경향을 많이 볼 수 있다. 심지어 보고 듣기만 하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고 하며 이제는 예배자가 몸으로 직접 참여하여 육감을 동원하는 예배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배를 참여니 교인의 축제 마당이니 하며 창의적 예배이론을 개발하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개혁주의 예배신학의 정립을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65)

그런데 예배와 찬송은 불가분의 관계다.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감정)을 시(詩)와 멜로디로 엮어 표현하는 감사요, 고백이요, 찬미이다. 예배 시 찬송은 구약 시대 유대교에서 초대교회 예배로 이어졌다. 구약 시편 내용 대부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은총을 바라며 그의 살아계심과 구원과 은혜를 찬양하며 부르짖은 시와 노래와 찬양들이다. 이 같은 찬송이 바울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찬양이 되기 바랐다.66) 하나님을 마음으로 찬양하고 시와 찬미로 노래하라고 했던 바울의 권고에서 우리는 찬송의 중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골 3:16, 엡 5:19) 

이같이 찬양은 하나님 예배에 중요 목적이요 필수적이다. 예배를 특징짓는 기본어로 “시편은 찬양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편과 다른 성경들은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찬미하고 높이고 경배하며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주님께 할렐루야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풍성하게 찬양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67)

한편 찬양은 참회, 죄에 대한 고백, 죄 사함에 대한 간절한 바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등 예배드리는 자가 느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에까지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예배에 대한 이런 면들은 우리의 찬양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들이다.68) 이제 이러한 예배에서의 찬송의 중요성을 전제로 하여 찬양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찬 양

1. 찬양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히브리어에 나타난 ‘찬양’의 어원적 의미

구약성경 특히 시편에서 주로 사용한 ‘찬송’과 관련된 용어들로서 다음의 여섯 가지를 들 수 있다.

  (ללה) : ‘찬양, 찬송하다’(동사의 피엘 즉 강조형)

이 단어는 구약에서 ‘찬송, 찬양하다’의 의미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인 용어로서 시편에서만 58회 이상 언급되었다. 이 동사의 기본형(칼형)은 ‘빛을 비추다, 자랑하다’의 뜻이다. 이 동사의 기본형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어리석다’라는 뜻이 되고(시 5:5, 73:3, 75:4 등), 이 동사의 강조(피엘)형이 사람에게 쓰이면 ‘자랑하다, 뽐내다, 칭찬하다’로 번역되었다.(시 10:3, 44:8, 창 12:5 등) 

이 동사의 강조형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만 ‘찬양, 찬송하다’의 뜻을 갖는다. 이스라엘은 이 용어를 통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 인간 자신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싶은 – 이기적인 욕망을 거부하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만을 찬양해야겠다는 비장한 결단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을 깨달았을 것이다.69)

② 트힐라(הלּהת) : ‘빛내다, 자랑하다’(동사의 피엘 즉 강조형)

이 용어는 할랄(ללה , 빛내다, 자랑하다) 동사의 강조(피엘)형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한글 개역 성경에 ‘찬송’ 또는 ‘찬양’으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시편에 31회 이상 사용되었다. 이 용어가 의미하는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빛내고, 우주 만물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⓷ 바라크(ףרבּ) : ‘찬송하다, 송축하다’          

바라크(ףרבּ)의 기본형(칼)과70) 강조형(피엘)71)이다. 바라크의 기본형은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를 의미하고 피엘형은 ‘송축, 찬양하다’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주체가 하나님이고 대상이 사람일 때는 ‘축복하다’로 번역되나(창 24:1, 26:24 등) 그 주체가 사람이고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는 ‘찬송하다, 송축하다’로 번역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칠십인 역을 포함한) 모든 성경 번역자들이 이 용어를 ‘하나님을 축복한다.’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다, 하나님을 송축하다.’로 의역한 것은 지극히 신학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축복(?)하는 행위가 찬양임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찬양의 일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 용어 대부분이 칼형 수동태(바룩, ורבּ)라는 것에도 유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비록 하나님께 복을 비는 주체가 인간일지라도 정작 하나님께 대한 송축은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의미하며 결국 하나님께 대한 송축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 ‘스스로’ 인간을 통해 송축을 받으시는 것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2)

  미즈모르(רמזמ) :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다 

개역 성경에서 ‘시(詩)’로 번역된 이 용어는 본래 ‘자마르’(רמז, 포도 가지를 따다, 뜯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현악기의 줄을 뜯으며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 이 용어를 칠십인 역에서는 ‘프살모스’(ΨαλμοϚ) 또는 ‘프살테리온’(Ψαλτηριον)으로 번역했는데 역시 그 뜻은 ‘현악기(뜯는 악기)’ 또는 ‘현악기를 동반하여 부르는 노래’를 가리켰다.            

이 헬라어 용어에서 영어 ‘Psalm 또는 Psalter’가 유래했다. 대개의 시편의 제목에서 이 용어 ‘미즈모르’가 언급되므로 우리는 본래의 이스라엘의 시편은 곡조가 붙어 있었고 그래서 시편을 기악으로 연주하거나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었음을 추측하게 된다.

시편에서 35회 이상 언급된 ‘자마르’(רמז)라는 동사의 강조(피엘)형도 ‘찬양하다’로 번역되었으나 그 본래의 의미는 ‘현악기를 뜯으며 찬양하다’임을 유의해야 한다. 여러 악기 중에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고양 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악기가 현악기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열광된 감정을 바치고자 했던 이스라엘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73)

  ⑤ 토다(הדוֹתּ) : ‘고백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토다’(הדוֹתּ)  이 용어는74) ‘야다’(칼형, הדי, 던지다)의 사역형(히필형)75) ‘호다’(הדוֹה) 즉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고백적 감사 찬양’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찬양은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이 아님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찬양이 회중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증거와 선포이어야 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6)

 ⑥ 샤바흐(שָׁבַח) : ‘큰 소리로 찬양하다’

샤바흐(שָׁבַח)의 피엘형 또는 히트파엘형77)은 ‘큰 소리를 내다, 찬양하다, 축하하다’라는 뜻의 용어로서 찬양은 격한 감정으로 큰 소리를 내어 부르는 고양된 언어임을 암시한다.

(2) 헬라어에 나타난 ‘찬양’의 어원적 의미

신약에서 ‘찬양’ ‘찬양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들은 다양한데 그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 hymnos-hymneo(ύμνος-ύμνεω) : ‘찬송하다, 찬양하다’

남성명사 ‘힘노스’(hymnos)는 신약에 2회 나오고(엡 5:19, 골 3:16) 동사 ‘힘네오’(hymneo)는 4회 나온다.(막 14:26, 마 26:30, 행 16:25, 히 2:12)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된 일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대한 ‘찬송하다, 찬양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찬양과 노래가 그러한 것처럼 신약에서도 찬송은 대부분 공동체의 예배의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② ode(ᾠδη) : ‘노래, 찬양’

‘노래, 찬양’의 의미를 지닌 이 여성명사는 헬라적인 용어로 신약성경에 7회 나오는데 주로 요한계시록(5회)에 나온다. ‘오데’(ode)는 신약에서 ‘힘노스’(hymnos), ‘팔모스’(psalmos)와 나란히 사용되기도 하는데(골 3:16, 엡 5:19) 별다른 의미상의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로 천상(天上)의 찬양과 관련하여 이 용어가 등장하는데 계시록 5:9, 15:3에서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혹은 십사만 사천의 인(印) 받은 자와 승리한 무리의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약에는 이 용어도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의 대상으로 하는 본문들에서만 사용되고 있다.78)

  ⓷ psalmos(Ψαλμος) : ‘노래, 시’

신약에서 ‘노래’ ‘시’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이 용어는 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킬 때 등장하는 히브리적 성향의 단어이다. 이 남성명사는 신약에 7회 나오는데 70인역(ⅬⅩⅩ)에는 히브리어 ‘미즈모르’(mizmor)를 이 ‘팔모스’(psalmos)로 번역하고 있다. ‘미즈모르’(mizmor)는 줄이 있는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찬송 시를 의미한다.

신약의 기록자 누가의 문헌에는 구약의 시편을 언급할 때 이 용어가 나오나(눅 20:42, 행 1:20,  눅 24:44 등) 에베소서 5:19와 골로새서 3:16에서는 이 ‘팔모스’(psalmos) 명사가 ‘힘노스’(hymnos), ‘오데’(ode)와 함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불렀던 찬양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79)

  ④ ainos-ainesis-aineo(ἀἰνος-αίνεσις-αἰνεω) : ‘칭송하다, 찬송하다’

‘칭송하다, 찬송하다’의 의미를 지닌 이 용어들은 신약에서 오직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찬송에만 사용되었다. 남성명사 ‘아이노스’(ainos)는 2회(마 21:16, 눅 18:43), 여성명사 ‘아이네시스’(ainesis)는 1회(히 13:15), 동사 ‘아이네오’(aineo)는 8회(롬 15:11, 계 19:5,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6회) 나온다.

하나님을 찬송한 자들은 천사들(눅 2:13), 목동들(눅 2:20), 어린이들(마 21:16), 무리(눅 18:43), 예수의 제자들(눅 19:37), 원시 초대교회 성도들(행 2:47), 치유 받은 앉은뱅이(행 3:8,9), 민족들(롬 15:11), 교회(히 13:15) 그리고 천상의 구원 받은 자들(계 19:5)로 나타난다.            

찬양의 이유는 구원받은 기쁨(눅 19:37), 아기 예수를 바라봄(눅 2:20), 구원의 체험(마 21:16, 행 2:47, 롬 15:11, 히 13:15), 치유 받음과 치유 행위(행 3:8,9, 눅 18:43)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 구원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났다.80)

  ⑤ dogsa(δοχα) : ‘찬양하다, 영광 돌리다’

‘독사’(dogsa)는  ‘찬양, 찬미, 명예, 영예, 영광’의 뜻을 가진 명사형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δοχα)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였다. ‘독사조’(δοχαζω)는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δοχαζω) 하니라.”(마 9:8)고 했다. 이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屬性) 및 내용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81)

이 외에 신약성경에는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찬양’ 또는 ‘찬양하다’의 의미를 지닌 말이 있으나 그중 대표적인 용어들만을 고찰해 보았다.

(3) 찬양의 형성과 역사

  ① 구약 시대의 찬양

찬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도록 신령한 상태를 만들어 주고 인간이 양심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라고 히브리 역사가들은 말한다.82) 이 말은 구약에서 찬양이 감당하는 역할이 어떤지 알 수 있게 한다.

구약 시대에 음악과 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춤은 음악과 같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인류는 예배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데 있어 본능적으로 춤과 음악을 사용했다.                  

구약 시대 춤은 출애굽기 15:20,21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소고를 손에 들고 여호와 앞에서 거룩한 춤을 추며 하나님께 찬양하니 다른 여인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춤과 노래와 환성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여 조화를 이루었다고 사무엘하 6:14,15에 이렇게 기록했다.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더라.”

다른 경우도 주를 찬양할 때 노래와 춤을 사용했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 찌어다.”(시 149:3)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 찌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 찌어다.”(시 150:4,5) 출애굽기 15장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기적을 맛보며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기적의 승리를 주셨기에 이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부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찬송 중 하나가 민수기 21:16-18이다.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그때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하였더라.”

이 말씀 이면에는 저들이 노래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러 날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뜨거운 사막을 걸었으니 얼마나 물이 그리웠을까? 이런 때에 여호와께서 그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그들의 기쁨은 충천했고 이 기쁜 감정을 노래로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사사기 5장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주신 후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한 완전한 노래가 기록이 되어있다.                  

구약 시대의 찬양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은 시편이다. 특히 시편 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는 구약성경에서 이 구절처럼 찬송에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구절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 구절은 ‘찬송신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구절이라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나타난 ‘찬송신학’에 의하면 인간의 궁극적 염원인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과 교제의 체험은 찬송을 부를 때 발생하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할 때 전능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곳에 오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찬송 가운데서 임마누엘의 은혜 즉 여호와의 자비, 은총, 능력, 구원, 기적, 신비, 기쁨, 희열, 지혜, 복 등을 현실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83)

찬양과 예배에 관한 한 다윗이야말로 유대와 이스라엘의 모든 왕 중에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의 시편은 오고 오는 세대로 찬양하게 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찬양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성도에게 함께 주님을 찬양하자고 권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찬양하도록 노래하는 자들을 가르쳤고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훈련 시켰으며 그들에게 온종일 24시간을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라고 지시했다. 다윗은 주께서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자신이 미천한 양치기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일평생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로 그는 계속해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84)

  사도시대 찬양

초대교회 때에도 찬양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찬미했다.(행 16:25) 그때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메인 것이 다 벗겨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초대교회는 끈임이 없이 핍박받는 교회였지만 그들에게는 모진 핍박 가운데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바울서신 중에 바울은 디도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찬양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찬양하라! 즐거이 찬양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감사의 찬양과 찬양의 제사 드리라고 요구한다. 그가 제일 강조한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였다. 그는 찬양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소 기뻐하는 찬양의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을 이야기하는 중에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특히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 ‘찬송 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걸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하면서 그 첫째로 ‘찬송 시’를 말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예배에 찬양이 중요한 한 요소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찬송 시’는 초대교회 예배에 사용되던 구약 시편 찬양을 의미한다.85) 이 ‘찬송 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예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에 나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에서 ‘시(詩)’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통해 초대교회에서 회당 예배의 전통인 ‘시편 노래’를 예배음악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두 번째 나오는 단어 ‘찬미’(讚美)는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대상으로 한 신앙의 찬가(讚歌)들 그리고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는 영적 찬양들을 의미한다.

두 본문의 컨텍스트(context, 전후관계)는 사도의 권면인데 에베소서에서는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면서 이 찬양의 주제가 등장한다. 이 본문을 통해 볼 때 ‘성령으로 충만한 삶’과 ‘찬송하는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찬양 시’(Canticle)에서도 볼 수 있다.

구약의 ‘시편 노래’와 비슷 형식의 이 ‘찬양 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하고 난 직후 부른 ‘마리아의 노래’(눅 1:46-55),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구약의 예언서 형식을 빌어 지은 ‘사가랴의 노래’(눅 1:68-79), 그리고 예루살렘의 경건한 유대인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드린 ‘시므온의 노래’(눅 2:29-32)를 지칭한다.86) 이 ‘찬양 시’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찬양하는 자들이 성령이 임하사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찬양한 것이다. 이 같은 찬양과 성령의 관계성을 성종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약에 나타난 찬양에 관한 진술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찬양은 성령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비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사가랴와 시므온도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셨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며 찬양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거듭난 최초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함께 떡을 떼고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행 2:42-47) 성령으로 충만했던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도 한밤중에 하나님을 찬양했고 에베소서 기자는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할 것을 명했다.87)      

이렇게 초대교회 찬양은 성령의 중요한 도구로서 음악 이상의 것이었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었고 그 결과에 따른 삶의 내용이 있었다. 그러므로 형식보다는 드리는 자의 마음 자세가 중요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노래뿐만 아니라 신자들 간의 관계를 위한 화답하는 음악도 있었다. 초대교회는 악기 사용이 거의 없었고 화려함도 없었으나 어느 시대보다도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한 찬양의 신앙공동체였다.88)

  ⓷ 중세시대 찬양(410년-1517년)

주 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칙령 발표 후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로마제국에서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었다. 지하 카타콤에서 조심스럽게 부르던 찬양을 이제는 지상에서 큰 소리로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에 편승하여 점차 이단적인 교리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 내에서 이단적인 노래도 불리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364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는 예배 시 악기 사용과 인간의 창작 찬송을 금하는 교회 법을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회중이 예배에서 찬송하는 것도 금지했다. 라오디게아회의에서 결정한 13번째 조항은 노래를 부르도록 지정된 사람(남자 성직자만 예배 시 노래하는 것이 허락됨) 외에는 아무도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즉 예배에서 회중의 찬양자 역할은 많은 부분에서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이 규칙이 일천 년 동안이나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506년 포르투갈 종교회의에서는 예배 시 회중도 찬송을 부르도록 권장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이미 회중 찬송은 사라지고 정교한 예전적(禮典的) 예배로 전환 되어있었다. 이렇게 중세시대는 회중 찬송이 사라진 시대였으나 그 대신 전문가들에 의해 교회음악이 매우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고딕 양식과 함께 이 정교한 교회음악 연주를 위해 파이프오르간이 교회에 들어왔고 다성 음악(Polyphonic music)은 마치 고딕 건물처럼 차원 높게 발전했으며 정교하고 공교하게 잘 짜여진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Missa) 형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형식이 되어버렸다.  

이런 중세의 대표적 교회음악을 ‘찬트’(Chant)라고 하며 교황 그레고리(Gregorius Anicius Ⅰ, 540-604)에 의해 ‘그레고리안 챤트’가 집대성되기까지 예배음악은 큰 발전이 없었다. 이때의 예배의식은 성만찬과 예전 중심이었으며 예배음악은 회중과의 교감이 아니라 예전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다. 말씀은 라틴어만을 사용했고 예배음악 역시 사제들만 부를 수 있었기에 예배에 참석한 회중은 단지 미사의 구경꾼과 ‘찬트’음악 감상자로 전락했으며 이것은 종교개혁으로 곧장 이어지게 된다.  

  ④ 종교개혁시대 찬양(1517년-1700년)

1517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다시 회중 찬송을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만인 제사장’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찬양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국어로 읽고 들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신자가 다 같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당한 음악적 자질이 있었던 루터는 스스로 작곡도 했고 ‘코랄’(Chorale)이라는 독특한 회중 찬송의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384장)는 아직도 많은 성도에게 애창되고 있는 루터의 코랄이다.89)

그러나 종교개혁을 선도했던 다른 두 사람 칼빈과 쯔빙글리는 루터와는 교회음악의 입장을 달리했다. 칼빈은 소극적으로 예배에 음악을 사용했고 쯔빙글리는 아예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 같은 생각의 배경에는 당시 부패하고 오만이 가득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음악에 대한 오용(誤用)과 부작용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다.

루터가 교회음악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문제가 있는 부분만 적절히 수정하는 편을 택했다면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예배 전통을 전부 무시했고 교회음악에서도 그들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은 당시의 화려한 오르간 음악과 성가대 음악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리 인간을 위한 것으로 치닫는 걸 보았고 더불어 연주자들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을 동시에 경험했다. 이에 칼빈은 성가대 폐지론을 주장했으며 말씀을 담을 수 없다는 이유로 예배 중 악기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 역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의 작용력에 크게 주목했다. 그는 이 작용이 원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자기도취를 위해 오용되는 것을 더 걱정했다.90) 그래서 칼빈은 멜로디를 통해 말씀이 가슴속에 스미는 것보다는 반대로 오히려 음악을 통해 나쁜 것이 성도들 가슴에 스미는 것을 더 걱정했다.91) 

하지만 그는 예배 시 교회에서의 ‘시편 노래’의 사용을 허락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선율 ‘시편 노래’에 한해 예배 시 사용할 것을 권장했으며 칼빈은 자국어로 운율을 갖춘 회중용 ‘시편 노래’92)를 직접 작사도 했다.93) 예로서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은 바로 이 칼빈시대 운율 ‘시편 노래’의 리듬을 약간 변형한 찬송이다.

이렇게 종교개혁 초기 찬송이 ‘코랄’과 ‘운율 시편 노래’로 그나마 약 일천 년간 부를 수 없었던 회중 찬송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지만 개혁의 열기가 차츰 식어가면서 다시 개혁교회는 예전적(禮典的) 교회 모습으로 변해갔다. 예배의 뜨거운 열기가 사라졌고 점차 예배 의식(儀式)이 곧 예배인 것처럼 착각하고 다시금 예배와 별 상관없는 순전히 ‘공연용 교회음악’ ‘감상용 교회음악’이 등장했다.

바하(J.S. Bach, 1685-1750)와 헨델(G.F. Handel, 1685-1759)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음악 작곡가들이었는데 그들의 신앙은 매우 깊었고 그들의 음악은 정교하고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예배 시 회중들이 찬송으로 부르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들이었다.  

  근세의 찬양(1700년 이후)

18세기 영국 – 1700년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교회 부흥 운동으로 활기가 넘치는 곡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회중 찬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증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94) 이 찬송은 당시 영국의 일반인들에게까지 불려지고 폭넓게 번져갔으며 이 찬송은 영국 전체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많은 웨슬리의 찬송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오늘날도 수많은 나라와 교파들이 그의 찬송을 부르고 있다는데 그 반증이 되고 있다.        

18세기 미국 – 무디(Dwight L. Moody, 1836-1899)가 주도한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으로 인해 자유스럽고 서민적인 찬송이 큰 부흥을 이루었다. 그는 말하기를 “찬송은 설교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감동시켜 부흥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을 심오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데 찬송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명한 가수였던 생키(Sankey, 1840-1908)와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을 대동하여 부흥 전도단을 조직하여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복음적인 가사와 단순한 선율로 많은 찬송을 작곡하여 부르게 함으로 미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95) 비록 이 같은 18세기 부흥송(Revival song)이 지나치게 개인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건전하고 객관적인 강조점을 강조하고 있었다.96)

19세기 – 이성(理性)과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던 고전주의(古典主義)에서 감정(感情)과 개성(個性)을 강조한 낭만주의(浪漫主義)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회중 찬송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는 문학적으로 순수하고 높은 시적(詩的)인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찬송은 교회의 정상(正常) 예배를 위한 찬송으로 많이 사용되었다.97)

20세기 전반 – 미국 찬송가는 영국의 왓츠나 웨슬레의 표현 방법을 진부하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 대한 개념도 점차 변화되어 감에 따라 찬송가의 내용도 달라지게 나타났다. 두려운 하나님보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미래에 약속의 땅을 향한 동경은 현세에서 적극적인 봉사로 곧 생동감 있는 생활을 강조하는 찬송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98) 또 20세기 미국 찬송가는 엄격한 교파적 색채를 띤 종전의 찬송가를 지양하고 기독교 공동의 음악 유산에서 편견 없이 좋은 것을 선택하며 교파를 초월하여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나타났다.

20세기 후반 –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경배와 찬양’이라는 제목하에 음악 예배형식이 생겨났다. 일반인들이 보통 생각하고 있는 복음성가 중심의 집회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장르였다. 그리하여 초기 시편 가들에서 —> 찬송으로, 찬송이 —> 복음 찬송으로, 복음 찬송이 —> 소위 현대 복음송(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중심’의 시편과 찬송이 전도와 개인 신앙을 중심 한 ‘인간(성도) 중심’의 복음 찬송으로 변천(변질?)되었고 마침내는 오늘날과 같이 주로 ‘인간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위 ‘현대 복음송’(modern CCM)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99)

2. 찬송가

(1) 찬송가의 태동과 배경          

16세기 이전 대부분의 예배 찬양은 ‘시편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 예배 찬양은 사제(司祭)와 교회 성가대만의 전유물이었다. 성도들이 부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또 회중들이 함께 부를 만한 보편적인 찬송 곡도 없었다.100) 결국 16세기 이전 대부분의 성도는 예배 시 침묵으로 찬양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시편 노래’ 이외의 창작 성가는 자칫 이단적인 요소가 끼어들 염려가 많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찬양하는 가운데 느끼는 즐거움을 죄악시 여겼기 때문이었다.

칼빈도 예배 찬양을 사제와 교회 성가대만 독점하는 걸 분명히 반대했지만 ‘시편 노래’ 이외의 창작시에 곡을 붙이는 것은 환영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다성부의 합창과 오르간 반주까지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 역시 찬양 시 느끼는 기쁨을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101) 그러나 루터의 생각은 달랐다. 세속 노래가 아닌 찬양 중에 느끼는 기쁨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혜라고 생각했다. 또 음악적 소양이 있었던 그는 손수 새로운 찬양을 창작했다.102) 이러한 찬양을 후세 음악가들은 복음적 찬송(Gospel hymn)이라 하여 ‘시편 노래’(hymn)와 구별했다.103)

그 후 이러한 복음적 찬송 형식의 찬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확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유의 찬송의 특징은 가사가 쉽고 간결하며 곡은 대부분 그 시대의 세속음악의 형식을 따랐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가 대부분 그런 복음적 찬송(Gospel hymn) 류의 곡들이다. 사실 찬송가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편 노래’는 우리 찬송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104) 그러므로 엄밀히 구분하여 교회 음악사적인 정의를 내리고 그 찬양 집의 명칭을 부친다면 오늘날 우리의 찬송가는 ‘복음 찬송 집’(Gospel hymn)이라고 해야 옳다.

(2) 찬송가의 중요성과 역할

  ① 찬송가의 중요성                

개신교에서 하나님 예배는 인간이 인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영광스러운 행위이다. 또 그것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의 사건이며 말씀과 성례 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시는 만남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러한 예배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중요하며 특히 회중이 예배 시 함께 부르는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105)

찬송가(讚頌歌, ὕμνος, Hymnus, Hymn)란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노래를 말한다. 확실하게 하나님만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는 게 찬송가다. 만약 그 노래 가사에 찬양의 내용은 있으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것이 없으면 그것은 찬송가라고 할 수 없다. 또 찬양의 내용도 있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노래로 불리지 않으면 찬송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노래가 찬송가로 불리려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찬양하되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는 것이어야 하고 노래로 불려야만 한다는 것이다.106) 

이 같은 찬송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정의는 시편 148편 그의 주석에서 표명한 것으로 이 정의가 633년 톨레도종교회(Fourth Council of Toledo, AD 633)의 당시 교회 기본법 속에 규정된 것이다.107)

한편 루이스 엘슨Elson, Louis Charles, 1848-1920)은 찬송가의 정의(正意)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거나 예배드리는 노래로써 교회에서 부르게 된 짧은 종교적 서정시이다.”라고 했다.108)

미국찬송가협회(The Hymn Society of America)는 칼 프라이스(Carl F. Price, 1881-1948)의 찬송가 정의를 받아들였다. “기독교 찬송은 거룩하고 경건하게 표현된 것으로 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태도 혹은 인간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목적을 노래로 불러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형식에 있어서 신령해야 하고 생각이 뚜렷하여 그 찬송을 부를 때 회중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끔 하는 것이다.”109)

또 교회 음악가 정정숙 교수(총신대학교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찬송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나 업적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
  • 삼위 각 위의 속성을 찬양하고 그의 업적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
  • 하나님의 창조사건과 인류 구속사건에 관련된 사물이나 일들을 들어 확신하여 설명하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감사하는 것
  •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양이 얽힌 기도와 간구 등의 모든 내용이 시로 표현될 때는 찬송시 혹은 찬송 가사가 되고 이 찬송시와 찬송 가사를 음악화하여 노래 불러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될 때 이것이 기독교 찬송가이다.110)

이상에서 살펴본 찬송가에 대한 정의들을 기준 하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실려 있는 노래들을 볼 때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곡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오늘 한국 개신교의 예배가 설교 중심 예배이다 보니 예배 중 찬송은 단지 설교를 돕는 역할로 한정되는 느낌이 있다. 예배의 찬송은 교인들의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설교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찬송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설교와 찬송은 그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둘 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하며 이런 면에서 예배 중 찬송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것이다.

  ② 찬송가의 역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찬송가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선 신앙인의 신앙표현이다. 하나의 찬송가가 지정되어 함께 불려질 때 그것은 곧 개인의 신앙고백이자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 신앙공동체 신앙의 고백적 표현이 된다.        

또 동일한 찬송가를 갖게 하는 심리적 현상의 작용으로 모든 회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결속과 소속감을 또한 갖게 한다. 찬송가는 하나님의 속성과 업적을 들어내어 칭송한 노랫말들로서 성경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가사로 되어있는데 이 노랫말들이 선율에 실리어 불려질 때 이는 아울러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는 교육 지침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찬송가의 역할에 대해서 김경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11)

  • 찬송가는 개인과 회중의 헌신행위에서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 찬송가는 성경적 견해를 밝혀준다. 찬송가마다 인용 성구나 참조한 성구를 명기해 놓았는데 이는 그 성경 말씀이 바탕이 되었거나 시편의 의역 또는 성경의 어떤 사건이 배경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을 담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찬송가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의 요소가 된다.
  •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성도들 간의 친교와 화목을 도모하게 된다.
  • 찬송가는 설교의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게 한다.
  • 찬송가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유익하다.

(3) 찬송가의 분류

  ① 찬양을 받는 대상에 의한 분류

제임스 데이비스(James P. Davis)는 ‘찬송가 개론’(Sing with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Hymnology)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 성가(聖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규정했다.112)

  •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노래
  • 인간이 인간에 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노래
  •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에게 말하는 노래

 이 같은 기준을 근거하여 찬송가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찬양가 또는 찬미가(Hymn)

찬양가(讚揚歌)란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로써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감사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찬양가(Hymns of Praise)와 기도 찬송(Hymns of Prayer) 그리고 감사 찬송(Hymns of Thanksgiving)으로 구분할 수 있다.113)

  ② 복음찬송가 또는 복음찬미가      

이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되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의 역사, 수단, 방법, 십자가의 도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를 말한다.114)

  ⓷ 복음성가

복음성가는 흔히 복음송(Gospel songs)이라고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두 가지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는 것인데 반하여 복음성가는 인간을 향하여 말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체험이나 간증을 노래하거나 성도들 또는 불신자들에게 교훈과 권면과 위로를 노래에 담아 전하는 것으로서 보통 부흥 집회나 복음전도 집회 때 많이 부른다.115)

그러나 보통 복음찬송가(복음찬미가)는 찬송가(찬미가)에 포함을 시키기 때문에 찬송을 받는 대상에 의한 분류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가(찬미가)와 인간을 향한 복음성가(복음송)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② 가사 내용에 의한 분류

찬송가를 가사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나눌수 있다.

  • ‘하나님의 찬송’ 즉 하나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것(Adoration)인데 어원적으로는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 신앙고백(Confession)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선언하는 것으로 신앙 내용을 공동으로 또는 행동적으로 표명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116) 
  • ‘기원’(祈願, Supplication)으로 성도는 공동 행위인 찬송에 참여하므로 개인적이며 개별적인 청원의 마음에 새로운 터전이 주어지고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감사의 제물’(Dedication)인데 그리스도에 의해 일차적이며 완결적인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이 있기에 성도는 ‘찬송의 제물’(제사, 히 13:15)로써 응답하는 것이다.117)

  ⓷ 형태에 의한 분류

현재 예배에서 사용되는 찬송에는 네 가지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

첫째, 시편의 가사 그대로를 본래의 히브리어 또는 리듬에 맞추어 번역된 라틴어 또는 방언으로 번역된 것을 영창하는 것이다.

이런 시편 영창은 히브리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천주교인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개신교인들만이 시도하고 있을 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시도해 본 적이 없다. 히브리인들은 ‘Cantilation’이라는 방법으로 시편 영창을 하지만 이것은 일반 회중이 부르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천주교회는 플래인송(Plain song)이라는 동방교회에서 유래한 시편 영창법을 사용했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플래인송 방법으로 영창을 하든가 아니면 새로 개발된 앵글리칸 챈트(Anglican Chant)로 노래하고 있다.118)

둘째, 시편을 운율 시로 바꾼 것이다.

이 유절 형식의 운율 시편은 찬송가 곡조에 붙여 노래하는데 그 선율과 리듬은 플래인송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선율의 흐름이 완만하고 리듬도 플래인송의 리듬이 그렇듯이 단순한 것이나 그 형태는 오늘날의 찬송가와 같은 것이다.              

가사도 가능한 한 본래의 시편에 근접하게 되어있고 시편의 내용을 철저히 유지하기 위해 시적인 표현과 서정적인 면에서 희생을 감수한 운율 시편이다. 이런 형태의 찬송은 칼빈의 제네반 쌀터(Genevan Psalter)라든가 또는 스카티쉬 쌀터(Scottish Psalter)에 담겨있는 찬송을 말하는데 이런 형태의 ‘시편 노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찬송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119)

셋째, 시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의역하면서 자유롭게 시를 쓰는 방법이다.

이를 패러프래이즈(paraphrase)라고 한다. 이것은 예배의 찬양으로 택해 부르는 시편이 수천 년 전의 옛 구약 언어로 되어있고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찬송이라기보다 나와 내 민족과 상관이 없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찬송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대와 각 민족의 언어에 맞지 않는 시편 찬송을 부르는 데에 거부감을 느낀 왓츠(Isaac Watts)가 처음으로 시도한 기법이다.

즉 시편의 모든 말을 신약 언어와 현대의 사고로 자기 민족의 상황에 추어 새로운 해석으로 쓴 찬송을 말한다. 이것이 두 번째 유절 형식의 운율 찬송과 다른 점은 운율 가사에서는 시편의 구절을 생략한다든가 그 순서를 바꾼다든가 또는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사상을 현대의 사고에 맞도록 고치는 일이 절대 금지된 데 비해 세 번째 이 패러프래이즈(의역) 방법에서는 시편 내용의 순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내용을 생략할 수도 있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본다.

넷째, 찬송 형태는 순전히 창작된 것으로 찬송가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많은 찬송이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작사 되기는 했으나 순수 인가이 창작 작품이란 인상이 더 진하게 풍기는 내용의 찬송이다. 오늘날 우리가 찬송가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이런 것들을 말하고 이 부류의 찬송가에는 복음성가인 경우가 많다. 찬송가를 임의로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점도 있으나 동시에 신학적인 배경과 성경 지식이 부족한 시인일 경우 임의로 찬송 시를 쓸 때 비성경적이거나 이단적인 요소가 그 찬송 시에 끼어들 위험성이 매우 크다.120)

(4) 찬송가에 대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

  ① 예배 찬송에 대한 인식문제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성경과 찬송가이다. 이 두 권의 책 없이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을 우리는 생각 할 수 없다. 성경을 신앙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찬송은 그 내용에 근거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찬송과 예배음악 문회를 살펴볼 때 한국교회의 예배 음악문화는 예배 시에 찬송을 부르는 목적이 잘못 설정되어 예배음악의 무질서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배의 올바른 찬송은 너무나 중요하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정한 예배음악이 필요하다. 왜냐면 찬송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성도의 근본신앙이 찬송에  의해 형성되어 불려지며 이것을 반복하는 과정 중에 찬송과 같은 신앙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배 시에 찬송이 잘못 사용되는 그 근본 이유는 목회자나 찬송인도자가 예배순서의 각 순서가 갖는 성경적이며 신학적 의미에 대한 무지에 그 근본 요인이 있다.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순서에서 각 순서의 성경적 또는 신학적 요구에 대한 바른 지식과 자세가 필요하며 그래야만 그 예배 자체가 갖는 예배음악과 예배에서 사용되는 바른 음악을 선곡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전하는 설교의 성경 말씀에 집중시킴으로 마땅히 찬송이 들어갈 자리를 생략해 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121)

현재 한국교회는 100년 전 찬송을 그대로 부르며 예배 시 사용하고 있다. 1894년 언더우드가 편찬한 ‘찬양가’와 오늘의 ‘통일 찬송가’가 내용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찬송을 부르는데 시대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찬송은 성경과 달라서 음악과 가사가 그 당시의 시대성과 사회성이 크다. 찬송가 가사에서 보더라도 일반적인 예배 찬송을 제외하고는 사회성에 따라 부르는 찬송 별 빈도수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서 삶 자체가 그렇듯이 생활 자체에 깊숙이 연관된 찬송가가 불려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외국 민요곡에 찬송 시를 붙인 것이 여전히 예배 시에 불리고 있고 지금은 잘 부르지 않는 우리 민족의 어두웠던 시절에 널리 불리던 찬송들이 있다. 또 외국 찬송가에는 없어진 지 오래된 찬송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 한국교회의 찬송가는 구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는 크게 예배 찬송(찬양가)과 복음성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중 복음성가는 개인의 구원과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고 이웃에게 구원받기를 권고하며 자기 개인의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감상적으로 노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22) 이런 특성 때문에 복음성가가 한국교회의 찬양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 또 복음송(CCM)의 영향이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위해 힘쓰는 일선 목회자들에게는 부흥회식 예배형태를 고집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흥 집회’와 ‘예배’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부흥 집회는 인간들의 회개와 선교를 목표로 하는 모임이요,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찬양의 모임이기 때문이다.123) 예를 들어 주일 낮 예배 시 개회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두고 찬송을 택하여 예배의 시작부터 경건하고 구원의 감격을 이루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개회 찬송을 복음성가(CCM)로 한다면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될 우려가 있다. 이같이 복음성가(CCM)는 그 의미와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될 때 은혜가 되는 것이지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예배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물론 예배 찬송을 선곡하는 예배위원은 적어도 어떠한 것이 복음적인 노래고 어떤 것이 예배를 위한 찬송이며 어떤 경우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124) 또 현재 사용되고 있는 ‘통일 찬송가’는 그동안 여러 가지 나뉘어 있던 찬송가들을 하나로 통합시켰다는 장점은 있으나 동시에 교파에 따른 여러 문제점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② 찬송가 편집상 문제    

곽상수 교수는 통합 찬송가의 첫인상은 개편 찬송가와 새 찬송가가 통합된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당히 흡수하여 축소판을 이루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면서 이미 채택되었던 외국의 좋은 예배 찬송들을 많이 빼고 복음성가는 더 많이 수록함으로써 예배 보다는 부흥 집회에 더 적합해졌으며 가사를 정정한 부분도 애매한 주관적 취향이 많이 엿보여 원칙도 없으며 한 마디로 새 찬송가보다도 오히려 더 후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125)

구두회 교수도 가사번역에 있어 어느 괴팍한 신학자의 아집으로 인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교파 중의 어느 특정 집단에게는 만족감을 주게 될지 모르나 대다수 성도는 불만이며 그리고 번역된 가사의 언어학적인 견지와 문헌적인 견지에서 검토해 보면 현재의 언어로부터 20년 이상 후퇴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126)

  ⓷ 찬송가 선곡 문제

한국교회 찬송 중에는 구시대의 찬송들이 너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작품의 역사적 현재성이 결여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송가 100곡 중에서 발표된 시대를 보아 가장 오래된 것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로 1529년 작품이고 가장 신곡은 ‘너희 죄 흉악하나’로 1887년 작품이다.127)

또 이전까지 사용해 오던 개편 찬송가나 새 찬송가에 들어있던 한국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줄어들고 오히려 번역 찬송가가 많아졌다는 사실과 찬송가의 발행목적이 예배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통일 찬송이 이전의 개편 찬송가나 새 찬송가곡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곡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복음성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져 찬송의 발전에 역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128)

앞서 말한 것처럼 예배 시 찬송가를 선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찬송가냐, 복음성가냐, 복음찬송가냐에 따라서 예배에 사용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성가(CCM)는 대중적인 음악과 흡사하며 교회의 예배와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 집회를 위한 것이다. 복음성가가 한창 유행하는 한국 현실에서 예배음악을 담당하는 인도자는 확실한 구분에 신경을 써야 하며 선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복음 집회가 아닌 장소에서의 복음송은 규제되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가 전문적인 음악가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교회음악에 대한 상식적인 분별력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특히 찬송가에 대해서는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찬송 시에 대한 고찰 및 찬송 작곡자에 대한 지식 등을 아는 게 현실적으로 올바른 예배를 위해 매우 절실한 것이고 찬송가가 어떠한 연유에서 어떠한 상황에서 작시 되고 작곡되었는가를 알고 있다면 매 주일 드리는 예배에서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의 성경 신학적인 지식은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찬송가학과 찬송가 해설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135)

예배 시 찬송의 역할이 중요한 것만큼 찬송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중대하다. 따라서 찬송에 있어서 혹은 그 외의 찬양곡의 가사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복음이 순수하고 왜곡됨이 없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두었던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이전에는 별문제가 없겠으나 종교개혁 이후의 찬송가와 무분별하게 복음성가(CCM)가 대두된 이 시대에는 신학적으로 분명해야 한다. 따라서 찬송가 선곡 시 사전에 작사 작곡자에 대한 신앙의 배경과 신학 사상의 검토가 따라야 한다.136)

Ⅲ. 예배와 찬양

1. 찬양의 위치

(1) 찬양은 능동적인 예배 행위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이다.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 피조물이자 자녀인 인간의 만남이 곧 예배이다. 예배는 또 피조물이자 자녀인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즉 경배로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예배는 또 하나님의 인격을 섬기는 일인데 구약 시대는 제사장이 따로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 모두 제사장이 되었다. 제사장의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며 제사장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드리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된다.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예배자의 응답(應答)으로 나뉜다. 이때 예배의 핵심이 말씀(계시)과 찬양(응답)이며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역사요 찬양은 성도가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다.137)

찬양이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자랑하듯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백성으로서 왕의 왕을, 종으로서 주님을,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것이 바로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에 놀라움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무감각하게, 무표정하게, 아무런 감동도 없이 찬양할 수 없다. 찬양에는 놀라움과 감탄, 기쁨, 감격, 흥분, 환희, 자랑스러움 등의 감정이 표현되어야 한다.

찬양은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138) 찬양은 선택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의무이다. 찬양은 단지 소리의 행위가 아니라 경배의 행위이며 또한 찬양이 성도의 삶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찬양은 항상 능동적이어야 하며 단정적(assertive)이고 표현되는 것(demonstrative)이며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찬양이 있는 곳에는 항상 움직임과 행동과 소리 그리고 노래가 수반 된다.”139)

(2)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시편 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시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체적 임재(臨在)와 역사를 가르친다. 인간은 찬양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찬양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맛보게 된다.  

과연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BC 960년경 솔로몬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봉헌의식을 거행했다. 다윗 왕의 유업을 솔로몬왕이 이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봉헌한 것이다. 법궤가 성막에서 성전 안으로 옮겨지는 이 의식을 거행할 때 4천 명의 찬양대원(대상 23:5)이 세마포(가운)를 입고 찬양할 때 많은 기악 연주자들이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나팔로 일제히 찬양했다. 나팔 부는 사람만도 120명이었으니 그 오케스트라와 찬양대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대하 5:13) 라고 외치는 이들의 찬송 소리는 또 얼마나 크고 우렁찼을까? 이런 찬송이 드려질 때 구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역대하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역대하 20장도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BC 853년경 이웃 나라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했다. 여호사밧 왕은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께 간구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해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에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적은 다 자멸(自滅)하고 말았다.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전도하다 옥에 갇힌 기사가 나온다. 치안 방해죄로 그들은 매 맞고 빌립보 깊은 감옥에 갇혔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찬양은 기적을 낳는다. 하나님은 찬양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괴로울 때, 슬플 때, 어려울 때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탄생 된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찬양하는 공동체였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도하고 찬양했고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이 힘차게 뻗어 나갔다.(행 2:42-47) 이러므로 바울은 그가 사랑했던 에베소와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날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했다.

(3) 찬양은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

  ① 찬양을 통한 전쟁의 성경적 근거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은 힘이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감화와 역사가 찬송을 통하여 강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송을 통해 영력(spiritual power)을 얻는다.140) 이러한 찬양을 통한 전쟁의 성경적 근거는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홍해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라며 하나님께 승리의 노래를 올렸다.

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라며 노래 했는데 KJV는 이를 ‘전쟁하는 자’(a man of war)로 번역했고 NIV는 ‘용사’(warrior)로 번역했다. 하나님이 바로와 그의 군대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가를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대한 전쟁 전략가의 행위를 증거 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막 여리고 성을 점령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칼을 빼 들고 나타났다.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수 5:13,14)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용사이시고 하늘 군대의 총사령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찬양 드릴 때 이에 반응하여 엄청난 승리를 가져다주신 예를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예는 에돔 족속들이 유다를 공격한 여호사밧 왕 시대의 이야기이다. 역대하 20:14,15에 여호사밧 왕이 두려움에 떨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이 야하시엘에게 임했다. 그는 레위지파 사람으로 다윗 왕 시대의 주요 음악가였던 아삽의 후손이었다. 야하시엘이 말하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고 했다.        

하나님은 야시엘을 통하여 전쟁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 승리의 약속을 위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다음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말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1) 그 후 여호사밧 왕은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그들로 맨 앞서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 20:21) 그는 성가대를 모든 군대보다 앞에 세웠다. 그날 누가 과연 진짜 용사가 될 것인지를 알았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 살육하였더라.”(대하 20:22,23)

이 전쟁에서 진정한 용사는 군대 용사들이 아니라 성가대의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셨다. 이 찬양자들이 부른 노래를 살펴보면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였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거나 하나님의 진노가 이방 사람들에게 퍼부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찬양 중에서 이렇게 노래 한 것이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며 또한 오늘 전쟁에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승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찬양을 통한 전쟁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도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을 전쟁이나 적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해결책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의 위력을 체험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찬양에 응답하시고 그들만 감옥에서 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을 사탄의 올무에서 풀어주신 것이다.

  ② 전쟁 중의 외침      

성경에는 찬양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여러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외침’은 찬양의 특별한 형태이다.141)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외침에 응하신 두 가지 특별 경우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여호수아 6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이다. 엿새 동안은 성을 한 번씩 돌고 일곱째 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성을 일곱 번 돌고 난 후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 6:20) 하나님께서는 이때 찬양의 외침에 반응하심으로 그들을 위해 그날 놀라운 승리를 이루셨다.

두 번째는 기드온 사건인데 하나님께서는 300명이 남을 때까지 이스라엘 군대의 수를 줄이셨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할까 함이니라.”(삿 7:2) 기드온은 300명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 군의 진영까지 갔다. 기드온의 명령에 따라 정한 시간에 300명 용사는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서 횃불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삿 7:20) 이 외침에 반응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승리를 맛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베푸시기 위해 이 찬양의 무기를 사용하기 원하신다.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찬양을 통한 전쟁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찬양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제나 원수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님이시고 승리자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힘 가운데서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터로 나가신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14)고 했다. 우리는 마치 자신에게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말고 능력 있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를 물리칠 수 있는 두 가지 무기를 주셨는데 우리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잡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할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고백만큼 성장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에 응답해 주신다.142)

(4) 찬양의 중요성            

우리 신앙생활에서 성경과 찬송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 둘은 마치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전자는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 명령,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우리 인간들에게 내리시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의하달(上意下達)인 데 비해 후자는 은혜와 축복을 받은 성도들이 그의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멜로디에 담아서 드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하의상달(下意上達)이다. 이 두 요소의 소통이 원만해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생활은 원만해지는 것이다. 이 상하 소통 잦으면 잦을수록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돈독 해지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깊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가 드리는 찬송은 하나님이 가장 즐겨 받으시는 제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3:15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옛날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제물로 드렸으나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하나님 어린양의 보혈을 믿는 마음의 제사 드리는 것인데 이 제사의 수단이 바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찬양이 이토록 중요함에도 오늘날 우리는 성경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찬양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그다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에 대해서 경건한 마음과 깊은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143) 이제 찬양의 중요성에 대해 성경 해석적인 방법으로 말씀 속에 내포된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① 메시아 계보 유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12의 아들들에 대해 예언과 축복이 나온다. 야곱은 먼저 장자 르우벤에 대해 “르우벤아! 너는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 하도다만은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 49:3,4)라고 했다.

르우벤은 장자로 야곱의 능력이요, 기력의 시작이라고 말하면서 르우벤의 한 사건을 되새기고 있다. 바로 르우벤이 아비의 침상 즉 야곱의 아내요 르우벤의 어머니가 되는 빌하를 범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144) 그러면서 장자가 누릴 수 있는 탁월함 즉 장자의 계보를 잇지 못할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야곱의 장자로서 당연히 장자의 계보를 이어야만 하나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일로 계보를 잇지 못하게 된다. 이는 르우벤 지파의 미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장자의 계보에 대해 언급 한 것이다.        

뒤이어 시므온과 레위에 관해서도 축복을 하는데 이들 역시 그 지파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는 야곱의 딸 디나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디나의 사건 때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 바로 그들의 잔인함으로 인해 그들도 장자의 계보를 잇지 못하는 이유가 된 것이다.

결국은 넷째 아들 유다가 야곱의 뒤를 잇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계보를 잇는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창세기 49:8-12에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유다에 대한 예언은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유다 지파로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나왔고 결국에는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다에게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하셨을까?

그것은 유다의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구약에 있어서 사람의 이름은 큰 의미가 있다. 특히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이름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다. 구약에서 이름의 중요성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유다의 이름 뜻은 ‘찬송!’이다. 유다의 이름은 그의 탄생과정에서부터 암시되어있다.

동생 라헬을 사랑했던 야곱과 억지로 결혼한 유다의 어미 레아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세월 동안의 고통을 하나님께서는 아셨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寵, 사랑)이 없음(즉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창 29:31)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네 명의 아들을 주셨다. 그런데 레아는 매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 고백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을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부터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둘째 아들 시므온(들으심)을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나를 싫어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이 아이를 내게 주셨도다.”라고 했다. 셋째 아들 레위(연합)를 낳은 후에는 “내 남편이 이제부터는 나에게 돌아오리라.”라고 이름을 지었다.145) 이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의 기도였다.

그녀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이름을 짓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사랑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찬양, praise)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창 29:35) 성경에서 처음으로 ‘찬송’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 단어는 온갖 맘고생을 했던 하나님을 찬송해 보지 못한 자로부터 비롯되었다. 레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아이를 낳은 것이다.146)

유다는 이렇게 구약에서 ‘찬송’을 말하는 첫 단어의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찬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다를 크게 사용하신다는 사실로 미루어 하나님께서 찬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결국에 유다는 그의 이름 그대로 구약의 모든 결과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지파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된다. 이 같은 사실로 우리는 유다의 이름에 내포된 ‘찬양’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된다.

  ② 행군 시 각 지파의 위치

두 번째 찬양의 중요성은 유다 지파의 이후 행적에 내포되어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12지파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세운 후에 하나님께서 지파대로 성막을 중심으로 진에 머무는 때와 행진할 때의 위치를 배치하셨다. 민수기 2장에서 진에 머무를 때 12지파의 배치를 언급하고 있다. 중심은 유다지파다. 유다는 ‘동방 해 돋는 편’에 진을 치라고 명하셨다.(민 2:3)

장정 60만과 여자들과 아이, 노인을 합하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되는데 이 사람들이 진 치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리를 배치하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다 지파만큼은 동방 해 돋는 편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했을까?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동방 해 돋는 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있으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강문호 목사는 성막 문이 동쪽에 나 있는 것은 해 뜨는 곳을 가리키고 문 앞에 메시아의 계보인 유다 지파가 자리 잡고 있어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47) 메시아 계보인 유다 지파와의 성막 문의 연계성을 강조하면서 의미를 찾은 것이다.  

유다 지파의 배치 위치는 ‘동방 해 돋는 편’이라는 말로 이미 해가 뜨는 곳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를 대망하는 소망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말뜻에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동쪽은 가장 먼저 해를 보고 준비해야 하는 위치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유다가 가장 먼저 깨어서 하루를 준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를 원하시기에 동방 해 돋는 편에 배치하신 것이다. 이렇게 진의 배치가 행진할 경우는 바뀌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할 때는 유다 지파가 가장 선봉에 서서 나아 간다.148)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가장 선봉에 서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앞의 장에서 여러 번 언급한 역대하 20장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며 나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진행할 때 찬양으로 택함을 받은 유다 지파를 선봉에 배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온전히 찬양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⓷ 찬양과 삼위 하나님의 사역

다음은 에베소서 1장에 나타난 삼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찬양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시기 위해 쓰여졌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일치와 연합에 초점을 맞춘 교회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런 중심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신론(神論)을 다루면서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 생애에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늘 충만한 사람이었다. 각 서신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편지를 쓰면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에베소교회를 구원 해 주시는 구원의 감격에 못 이겨 첫 시작부터 삼위 하나님에 대해 “찬송하리로다!”라는 찬양으로 시작했다. 우리의 구원이 너무 크고 보배로우며 모든 복을 다 주셨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그 큰 은혜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 성부의 사역과 목적

본문 에베소서 1:3-6까지는 크게 여섯 가지로 하나님의 예정(豫定)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예정의 시기 : 창세 전에(엡 1:4)

둘째, 예정의 방법 : 그리스도 안에서(엡 1:4)

셋째, 예정의 이유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넷째, 예정의 근거 :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다섯째, 예정의 내용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여섯째, 예정의 목적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 1:6)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는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지만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 성자의 사역과 목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속’이다. 에베소서 1:7절에서 바울은 구속에 대해 속전의 개념으로 정의를 하고 구속의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와 ‘그의 은혜로 우리를 넘치게 하셔서’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심이 얼마나 충만한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속하신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에베소서 1:11,12에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절)라고 조건부로 제시하고 궁극적 목적으로 에베소서 1:12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밝히고 있다. 즉 성도 자체가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성도가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리고 예수의 형상을 닮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 성령의 사역과 목적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의 사역을 설명한 후 이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에베소서 1:13과 14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성부의 사역은 한마디로 ‘예정’이라고 했고 성자의 사역은 ‘구속’이라고 했다.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치심’이다. 본문에서 성령의 ‘인치심’ 받는 방법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한 믿음이다.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성령으로 들어야 내적 소명을 입어 사람이 거듭나듯이 주님을 믿는 믿음도 역시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믿어지지도 않거니와 믿을 수도 믿음을 고백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셋째, 마지막 14절에서 성령의 인치심 사역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 사역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다.

이같이 에베소서 1:3-14까지 삼위의 구원 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놀라운 것은 삼위의 구원 사역이 전부 궁극적으로 피조물들로 삼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삼위의 구원 사역의 과정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정’과 ‘구속’ 그리고 ‘인치심’의 모든 사역은오직 삼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사 우리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찬양’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들의 귀는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의 찬송을 듣도록 열려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입술로 만의 찬양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찬양에 대한 뜻이다.                

우리는 또 다윗이 그토록 찬양에 관심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걸 생각해야 한다. 그 많은 시편의 찬양들 특히 구원에 대한 감격의 찬양을 우리는 드려야 한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29-31)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기쁨으로 찬양해야 한다. 왜냐면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 모든 천사의 입을 총동원해 하나님 영광을 찬양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하심과 그의 사랑의 뜨거움을 다 표현할 길은 없다.

2. 찬양 대상과 방법

(1) 성도의 찬양 대상은 누구인가?

  •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히 13:15)
  •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시 96:2,3)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마 21:9)
  •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9:2)                                          
  • 내가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나니(시 18:3)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
  •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시 18:49)
  • 여호와를 찬송할 지어다!(시 31:21)
  •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리로다.(시 43:5)
  •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시 47:6)
  •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어다.(시 68:19)
  •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

이같이 성도의 찬양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뿐이시다.

(2) 찬양은 왜 해야 하는가?

  •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을 인하여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사 24:14)
  •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 138:5)
  • 하나님의 탁월성 때문이다.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 나심이로다.”(시 148:13)
  • 하나님은 광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
  •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이다. “여호와여! 신중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 하나님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20)
  • 하나님은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시 21:13)
  •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지어다.”(시 107:8,15,21,31)
  •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로우심이 영원하도다.”(대하 20:21)
  •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이다.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 하오리니”(시 138:2)
  •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기 때문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3) 찬양은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 지혜로써, “지혜의 시로 찬양할 지어다,”(시 47:7)
  • 영으로써,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 온 마음을 다하여,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시 9:1)
  • 입술로써,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119:1710)
  • 입으로써, “내 입이 주를 찬양하여 전파할 지어다.”(시 51:15)
  • 기쁨으로써,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 즐거움으로써,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대하 29:30)
  • 감사로써,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시 147:7)
  • 항상,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
  • 삶의 끝까지,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 더욱더,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로다.”(시 71:14)
  • 날마다,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대하 30:21)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엡 5:19)
  • 새 노래로(시 149:1)

(3) 찬양은 언제 드려야 하는가?            

  • 항상(시 34:1)
  • 아침에(시 59:16)
  • 영원히(시 61:8)
  • 종일토록(시 71:24)
  • 이제부터 영원까지(시 113:2)
  • 나의 생전에, 나의 평생에(시 146:2)
  • 즐거울 때(약 5:13)
  • 감사할 때(대하 7:6)
  • 가난할 때(시 74:21)
  • 예수의 능력이 나타날 때(눅 18:43)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느 5:13)
  • 병이 나았을 때(행 3:8)
  • 종일토록(시 71:8)
  • 해 돋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시 113:3)
  • 성전에 나아갈 때(시 42:4)
  • 은혜의 체험 후에(삼하 22:50)
  • 죽음 앞에서(막 14:26)
  • 옥중에서(행 16:25)
  • 이제부터 영원까지(시 113:2)

(4) 찬양은 어디서 드려야 하는가?

  •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시 89:5)
  • 높은 데서(시 148:1)
  • 침상에서(시 149:5)
  • 성소에서(시 150:1)
  • 만국 중에서(시 57:9)
  • 성도의 회중에서(시 149:1, 22:22)                    
  • 많은 백성 가운데서(시 35:18)
  • 교회에서(히 2:12)
  • 무리 중에서(시 109:30)
  • 열방과 만민 중에서(대상 16:23)
  • 권능의 궁창에서(시 150:1)
  • 옥중에서(행 16:25)
  • 정직한 자의 무리 가운데서(시 111:1)
  • 천국에서(계 14:3)
  • 전쟁터에서(대하 20:21)
  • 하늘에서(시 148:1)
  • 시온에서(렘 31:12)
  • 땅끝에서부터(사 42:10)

Ⅳ. 현대교회 음악

                                  – CCM을 중심으로 –

1. CCM의 정의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이하 CCM)이란 무엇인가? CCM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 현대적인(동시대의,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CCM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가스펠 송(gospel song)이 대략 성스러운 가스펠(Sacred Gospel), 영적 가스펠(Inspirational Gospel), 현대 가스펠(Contemporary Gospel) 세 가지로 구분되던 시기였다.

성스러운 가스펠(Sacred Gospel)은 교회에서 불리던 음악이고, 영적 가스펠(Inspirational Gospel)은 오늘날의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경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가스펠(Contemporary Gospel)로 분류된 것은 그 당시 미국 남부에서 남성 4중창 스타일이 가장 유행하던 대중적 복음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CCM이 ‘동시대의 기독교 음악’, ‘대중 기독교 음악’이란 의미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CCM의 세 단어 중 기독교적이라는 말과 현대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기독교적’이란 말은 가사 내용에만 적용된다. CCM의 음악 스타일 자체는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비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음악일 뿐이다. 또 ‘현대적’이란 말은 단순히 ‘시대와 더불어서 함께’ 또는 ‘당대’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용어는 CCM이 ‘더불어서 함께’하는 현대 대중음악 스타일을 정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149)

2. CCM의 기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음악도 각 나라와 지역의 특성과 그 문화의 특성에 따라 만들어지고 불리어 왔다. 또 지역마다 고유의 악기를 사용해서 그 음악을 연주해 왔다. 그래서 그 내용은 같으나 그 스타일은 독특한 형태로 발전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전자(電子) 악기가 출현하고 그 악기를 사용한 음악이 전 세계에 일반화되면서 이제는 음악과 음(音)의 예술적 기술적 차이와 한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교회 안에만 머물러 왔던 크리스천 음악도 새로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물론 새 옷을 입은 크리스천 음악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1) CCM의 태동

전통적인 교회음악이 오늘날의 CCM으로 변화된 첫 번째 시도는 1964년 미국의 레이렙(Ray Repp)이라는 사람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포크 음악 미사’(Folk Music Missa)를 선보인 것이 그 시초다. 파이프오르간의 장엄하고 웅장한 미사곡만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포크 음악 미사’는 매우 충격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듬해 1965년 랄프 카마이클(Ralph Carmichael, Orchestra)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선교영화 ‘The Restless Ones’(쉼이 없는 사람들)에 영화음악을 삼입하며 싱코페이션(박자의 강약을 바꾸거나 전환하는 음악 기법)이 가미된 음악을 사용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전통적인 교회음악에서 이전까지 사용하지 않던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스펠 송이 1920 흑인영가와 재즈의 요소를 혼합하여 생기있고 더욱 발랄한 곡으로 변해갔다. 그 후 1960년대 말 1970년 초 다시 말하면 록앤롤(rock’n’roll)의 등장 이후 일반 대중음악이 대단히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록을 가미하여 급기야 일반 팝계에도 알려지게 되어 1970년 말부터 CCM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CCM 음악 스타일은 팝(pop) 록(rock) 등 대중적 세속음악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CCM은 팝, 록, 하드록, 펑크, 테그노 팝, 랩, 뉴웨이브, 서던록, 댄스팝, 컨추리록, 발라드, 코미디, 유며, 포크, 어쿠스틱, 인스피레이셔널, 아카펠라 등 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

(2) 한국교회CCM

그러면 한국교회는 언제부터 CCM을 접하게 되었는가? 한국은 기독교 문화의 대부분을 서양을 통해 받아들였고 개신교의 경우 미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우리 손으로 우리 노랫말로 곡이 붙여진 찬송가가 당시 거의 없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매 주일 드리는 예배 때마다 서양 찬송가를 그대로 불렀고 교회 성가대 역시 대부분이 서양 음악을 불렀다.

이런 흐름 속에 1970년경 매우 부르기 쉬운 CCM이 대부분 교회의 교회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1973년 ‘예수 전도단’에 의해 ‘내게 강 같은 평화’, ‘작은 불꽃 하나가’, ‘내 등에 기름을 채우소서’ 등의 짧고 경쾌하고 따라 부르기 쉬운 CCM이 급속히 확산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본격인 CCM은 1980년 최덕신(주 찬양 선교단)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앨범, ‘그 이름’) 1981년 12월 14일에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성사되었고 음반으로도 제작 보급되었다. 그 외 최인혁의 ‘어두워진 세상’, 1987년 ‘요나단 듀엣’, 1989년 박종호의 ‘축복 송’이 맥을 이었고 1990년 이후 CCM은 말 그대로 홍수사태라 할 수 있다.

(3) CCM의 문제점

   ①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서 CCM의 문제에 대한 조영엽 박사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150)

  • CCM은 감정적인 면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기독교 신앙은 지정의 전인격적 균형을 요구한다.)
  • CCM은 자신을 즐겁게 한다.(찬양의 목적이 인간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 CCM은 신자들의 신앙을 저하시킨다.(CCM에 깊이 빠지면 상대적으로 말씀과 기도에 관심이 약화 된다.)
  • CCM은 전통적 예배의식을 파괴한다.(개혁주의 예배형식은 미신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거부하고 성경을 근거로 발전된 것이다. CCM은 이러한 예배형식을 무시한다.)
  • CCM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장벽을 쌓는다.(오늘날 CCM은 시초와 달리 일반인은 따라 부르기 어려운 현란한 기법으로 변했다.)   jack
  • CCM의 작사자들 작곡자들은 자질과 자격이 부족하다.(가장 큰 문제는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작사 작곡자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 CCM은 가사 내용이 너무나 빈약하며 잘못되었다.(위와 동일)
  • CCM은 비성경적 연합운동을 촉진한다.(개혁주의는 동일한 성경적 신앙고백을 중시한다. 그러나 CCM은 이를 무시한다.)

  ② 크리스천 록 음악 사례에서

CCM을 반대하는 견해를 들어보면 대부분이 순수 음악과 교회 음악가들과 신학자들이 반대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교회 내에 CCM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이 크게 일고 있다. 반대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 세속음악을 대표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간음하는 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게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지금의 크리스천 록 음악은 세속음악의 대표 격인 록 음악이 기독교라는 허울을 쓰고 교회에 침투한 세속음악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음악의 특징은 세상과 벗 되게 하여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쾌락을 추구하며 현대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독버섯과 같은 타락의 요소가 있다.

  • 예배형식의 경건함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 경건, 신비, 은혜’ 이 네 가지 요소가 겸비된 것을 중요시한다.

또 악기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순음 악기며 또 하나는 잡음 악기이다. 순음 악기는 피아노라든지 바이올린 등의 건전한 악기를 의미하며 잡음 악기는 전기의 힘을 빌려서 큰 감동을 일으키며 빠른 템포를 보여주는 굉음 증폭 악기이다. 이 잡음 악기는 리듬이 강하고 비트가 강하여 춤을 수반하게 되며 템포가 아주 빠르다. 템포가 빠른 것은 양면성이 있는데 뜨겁게 찬송할 때에는 빠른 템포가 매우 유익한 것이지만 세속적인 모습일 때는 예배의 정숙함과 경건을 무너뜨리므로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다.

  •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록 음악을 부르는 가수들 대부분이 기독교를 모독하고 있으며, 마약, 섹스, 폭력 등을 동반하고 있으므로 반기독교적 비신앙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이러한 록 음악의 형태는 사단이 자기의 주 무기로 세상을 미혹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찬송에는 언제나 그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도 거룩성이 겸비되어야 한다.

  • 보편적 윤리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록 음악에 심취한 자들의 일반적인 형태는 긴 머리, 불쾌감을 주는 흐트러진 복장과 문신, 마약, 폭력, 광란의 연주, 프리섹스, 불신앙 등이다. 이 같은 불경건한 록 음악이 교회로 침투하게 되면 기독교 윤리는 무너지게 된다.            

이상과 같은 CCM 반대 주장에 대해 CCM 옹호론자들은 새로운 음악의 출현에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물론 새로운 사상의 출현은 언제나 저항과 고통을 수반하였음을 동서고금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하는 록 음악의 출현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CCM 반대가 새로운 것의 출현에 따르는 당연한 귀결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즉 저들은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이단의 괴수(바알세블)’로 불렸다는 걸 내세우는데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저항받고 박해받는 이단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 죄를 지시고 박해받고 저항받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크리스천 록 음악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현실주의자들이며 세속적인 요소가 많다. 그들 가운데 신앙적인 경건한 삶을 사는 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술집의 타락한 장소에서 사용하는 록 음악의 형태가 그 모습 그대로 경건한 예배 장소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논리에 맞는 것인가? 록 음악의 형태로 연주하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할진대 크리스천 록 음악의 유입은 찬성 받을 수 없는 것이다.151)

  ⓷ CCM의 상업화 문제

초창기 CCM은 상업적 목적이 없었다.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신앙의 모습, 선교 도구로서 기능 또 회심한 대중음악인들의 열정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로 CCM이 태동했다. 그 때문에 초창기 CCM은 전혀 상업적인 면이 없었다. 그러나 CCM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이 바뀌면서 CCM은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즉 CCM은 선교나 문화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산업으로서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CCM이 산업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은 CCM이 음반이라는 상품을 그 매개체로 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CCM은 크게 확산이 되었는데 CCM을 둘러싼 업계도 차츰 규모를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같이 CCM이 확산이 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업적인 문제가 야기 되었다.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아티스트,’ ‘올해의 앨범,’ 등등 일반 팝계에서 홍보와 상업적인 목적을 시행하는 시행제도가 CCM에도 도입됐고 라디오나 잡지를 통한 광고도 많아졌다. 또 인기 있는 복음송 가수는 대형 집회 때마다 세속의 인기 있는 연예인에 뒤지지 않는 명성과 수입을 누렸다.

그리하여 가장 잘 팔리는 앨범이 가장 위대하고 효과적인 선교라는 등식이 은연중에 생기게 되었다. 이런 논란에 있는 CCM을 과연 “교회음악으로 예배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진정으로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만이 예배음악으로 사용될 수 있다.”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결론

1. 요 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데 있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사 43:21) 이것은 절대자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다. 피조물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관계는 영원한 생명의 관계다.152)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그의 위엄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찬양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로 그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시편 22편은 하나님께서 바로 찬양 중에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찬양을 통해서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153) 

또 우리가 찬양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대화의 채널을 열어놓는 것이 된다.154)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은 예배의 감명적인 기능과 표현적인 기능이 찬양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찬양을 통해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그의 영광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찬양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이 세상에 반포한다.155)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찬양이며 ‘선을 행하므로’ 그들 자신을 제사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사를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어느 때에든지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 드려야 하기 때문이며 그 찬미의 제사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인간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한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약속을 실행하실 뿐만 아니라 전에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한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을 주셔서 사람의 입술에서 찬송과 감사가 나오도록 하게 하시며(사 57:19), 죄로 인해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었으나 이런 인간에게 있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기쁨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기쁨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으며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다.156)

즉 찬양은 성도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증거요 그로 인해 찬양하는 성도들은 그 안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에 찬양으로 감싸 있었다. 욥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 친구들의 불완전한 지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2-7) 

이같이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은 찬양의 합창에 함께 가담하였다. 태초에 온 세상은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은 찬양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시편 149:1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말씀하시고 시편 149:2에서는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또 이사야 43:1에서는 이렇게 말씀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책임을 담당하셨다. 이것은 우리로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양케 하기 위함이다.157)

그리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을 보면 네 생물의 경배하는 모습을 본 이십사 장로들이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장엄한 보좌 앞에 내려놓으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라고 찬양한다.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렀으며 찬양과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며 필수적 내용이다. 시편에서는 예배의 성격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단어를 ‘찬양’이란 말로 쓰고 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예배를 특징 짓는 말의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예배자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경건과 두려움으로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성경대로 예배해야 한다.158)

찬양이란 이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섭리에 대한 헌신과 고백이다. 그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찬양은 하늘나라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본연의 자세인 것이다.159)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본질적 위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해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서 응답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소요리문답’ 제1문 서두에서 잘 밝히고 있는데,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찬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통하여 인간으로부터의 기쁨과 즐거움의 고백이 찬양의 성경적 원리라 하겠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참된 예배는 온몸과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롬 12:1) 이러한 영적 ‘삶의예배’에 가장 합당한 찬양은 영적 ‘삶의 찬양’이다. 입술만의 찬양, 마음만의 찬양을 뛰어넘어 온 삶과 영혼으로 드리는 ‘삶의 찬양’이야말로 영적 예배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신령하고 아름다운 찬양 하나님이 진정 기뻐 받으시는 찬양인 것이다.

2. 제언      

현재 한국교회가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내용보다는 기복신앙(祈福信仰)에 편승하여 자기만을 위한 복을 기원하고 만사형통을 바라는 감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또 이런 찬송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보다 ‘나’라는 개인주의 의식이 강하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함께 모여 예배한다는 ‘공동체 예배’(Corporate Worship)라는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예배음악은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 시편은 기독교가 물려받은 가장 귀한 음악적 유산으로서 성전과 회당 예배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편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적 체험을 노래했다. 초대교회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도 ‘시편’은 교회음악의 가장 중요한 출처였다.

16세기에 와서 시편은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지도하에 자국어로 운율적인 형태를 갖추어 번역되었으며 여기에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순한 곡조가 붙여져 최초로 프랑스 개혁교회(Reformed Church) 회중 찬송이 되었다. 그 후 칼빈은 예배음악을 시편으로 제한하고 ‘운율 시편 노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칼빈은 제네바의 프랑스 개혁교회 ‘제네바 시편 노래’(1543년)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중략)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영광 돌리게 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가 여러 면에서 찾아보았으나 성령 자신이 말씀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다윗의 시편보다 더 합당한 노래를 찾지 못했다.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 하나님이 우리 입에 말씀을 주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60) 이처럼 칼빈은 시편을 가장 적절하고 좋은 교회의 노래로 택하고 예배음악으로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왓츠(Isaac Watts, 1674-1748)가 시편을 오늘날의 찬송가 형태로 개작하여 찬송가로 부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늘날 예배 찬송 중에 시편을 기초로 해서 쓰여진 것은 이때부터 되어진 일이다.

19세기에 있었던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의 산물인 복음주의적 찬송 때문에 잠시 후퇴했던 ‘시편 노래’는 현대에 와서 그 자리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 개신교 예배에서 시편은 ‘시편 송’이 아닌 ‘시편 교독문’으로만 활용되는 것은 개신교 예배의 잘못된 경향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시편을 교창 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시편을 노래하지 않고 단지 교독하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에 시편이 ‘찬양’이라는 개념을 상실하게 된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의 중심요소로 발전해 온 시편의 예배 활용과 그 연구는 모든 교회 음악인들이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이제 현대 한국교회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시편을 번역하고 아름다운 시편 가락으로 ‘시편 찬송’을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기를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번역 작품과 훌륭한 ‘시편 찬송’을 많이 만들어서 품위 있는 예배음악을 형성하는 게 매우 시급한 일이다. 왜냐면 어떤 예배음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날 예배 분위기는 물론 예배 내용이 결정되며 인간을 향해 부르는 노래인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예배에서 시편 150편이 ‘찬양’으로 회복되어 예배때 불려지기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현재의 구태의연한 예배의식에서 ‘시편 찬송’을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예배음악으로 개발하고 도입하여 모든 ‘회중의 참여’ 속에 예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둘째, 양적 교회 성장만 추구해온 교회 예배에서 새로운 시편 음악의 창작과 ‘시편 찬송’을 적극 활용 질적으로 품위 있고 성숙한 예배음악을 육성해 나가도록 한다.          

칼빈은 “시편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올려주며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함으로 청원하고 높이는 열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라고 했다. 시편은 하나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며 일반 찬송보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161)

셋째, 시편을 노래할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시편을 규칙적인 운율 시로 바꾸는 작업과 함께 한국 찬송가에 ‘시편 찬송’을 싣는 작업이 우선 되어야 한다. 물론 현재 부르는 찬송가에서 ‘시편 찬송’으로의 전환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나 교회음악을 연구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시편 찬송 편찬 전문위원회’가 구성해 체계적으로 ‘시편 찬송’을 개발한다.(*) 글쓴 이 / 박정순(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 실천신학전공) ㈜ 이 글은 본지의 편집에 맞도록 요약하여 재편집 한 것입니다.(편집자) 원문 / 2003학년도 석사학위(M.Div.) 논문, ‘개혁주의 예배에서 찬송의 위치와 현대교회 음악의 성경적 조명’ 지도 교수 조영엽 박사

‘시편찬송’을 불러야만 개혁교회인가?

‘시편찬송’은 16세기에 편집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시편찬송’의 기원은 독일 남부의 자유제국 도시 스트라스부르그이나 ‘시편찬송’의 대중화는 스위스의 신생 자유도시 제네바였다. 그리고 ‘시편찬송’ 보편화의 선구자는 칼빈이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피난민교회를 목회하던 시절인 1539년 ‘시편 집’ 초판을 출간했다. 여기에는 19편의 ‘시편찬송’과 3개의 일반 찬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 중 6편의 ‘시편찬송’과 3개의 일반 찬송은 칼빈 작사였다. 즉 칼빈이 시편을 곡조에 어울리도록 운율을 넣어 개작한 것을 말한다. 나머지 13편의 ‘시편찬송’은 끌레망 마로(Clément Marot)가 개작한 것이었다.

칼빈은 1539년 판을 시작으로 이후 계속 개정 증보판을 내다가 사망 2년 전인 1562년 비로소 시편 150편 모두가 개작된 ‘제네바 시편찬송집’이 완성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찬송집에는 모두 124개의 곡조가 사용되었는데 104개의 곡은 하나의 시편을 위해 사용되었고, 15개는 두 편, 4개는 세 편, 1개는 네 개의 시편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렇게 종교개혁 후 제네바에서 예배 시에 불리기 시작한 ‘시편찬송’은 제네바 종교개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통해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대부분 개혁교회가 지금까지도 이 ‘시편찬송’을 이어오고 있는 반면 대부분 장로교회는 ‘시편찬송’의 전통을 포기했다.          

우리가 주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처음부터 ‘시편찬송집’에는 시편이 아닌 일반 찬송가도 들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시편만을 유일하게 합당한 찬송으로 고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편찬송’은 칼빈의 ‘오직 성경’의 원리와 부합하는 전통이다. 칼빈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는 예전 즉 예배형식을 인간이 발명한 위험한 전통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찬송도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시편 절대주의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칼빈에 따르면 예배를 위한 찬송으로서의 시편은 다른 어떤 찬송보다 탁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편찬송’의 가사는 히브리어에서 직역된 불어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을 하지 않고 운율에 맞추어 재해석한 내용으로 의역되었다. 또 이 가사는 시대와 언어에 따라 조금씩 변천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시편은 내용상 기도다. 그래서 찬송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시편들은 기도이면서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신앙적인 삶에 대한 노래가 시편이다.(*) 글쓴 이 / 황대우 교수(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 미주 >

1) 정장복, ‘예배와 신학’(서울: 장로회신학출판부, 2000), 142.
2)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150.
3) J. Gresham Machen, Chritianity and Liberalism(Grand Rapids: Eerd. Co, 1974), 54.
4) 위의 책, 155.
5) 위의 책, 135-36.
6) R.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Eerd. Co, 1967), 346-52.
7) 로마서 11:36.
8) J.J. Von Allmen, Worship: Its Theology and Practice(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9)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157-58.
10) 위의 책.
11)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Eerd, Co, 1948), 285.
12) Robert E. Webber, WORSHIP-OLD AND NEW 김지찬 역, ‘예배학’(서울: 생명의 말씀사, 1966), 14.
13) 위의 책, 248.
14) Jeremiah Burrougs, Gospel Worship, 서창원, 최승락 공역, ‘예배의 타겟을 복음에 맞추라’ (서울: 도서출판 진리의 깃발, 2002), 24.
15) 출애굽기 3:12; 8:1.
16) 신명기 26:5-9.
17) 시편 24:3-4.                                                      
18) 아모스 5:21, 미가 6:6, 예레미야 6:16, 7:21.
19) John Calvin, Institutes, Ⅳ. ⅩⅦ. 44, 1422.
20)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0), 445.
21) 위의 책, 446.
22)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서울: 이레서원, 2001), 123.
23) Cootton, Some Treasure Fetched Out of Rubbish(London, 1660), 34.
24) R. 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Eerd. Co, 1953), 346.
25) 위의 책, 348.
26) John. Macarthur, True Worship, 한화룡 역, ‘참된 예배’(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86), 89
27) 위의 책, 90.
28) R. 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 348.
29) 위의 책, 349.
30) 위의 책, 351.
31) 조영엽, ‘교회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148.
32) PH. J. Huijer, Het Exempel in de Prediking (Groningen, 1951), 119.
33)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165.
34) 양승달, ‘개혁파교회 예배의 본질적 요소들’(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78), 114.
35) John C. Ryle, Knots United(Ⅱ) 지상우 역, ‘예배하는생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108-09.
36) 조영엽, ‘교회론’, 167.
37)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서울: 이레서원, 2001), 167.
38) 위의 책, 167.
39) 조영엽, ‘교회론’, 166.
40) Michael J. Taylor, S.J, The Protestant Liturgical Renewal: A Historcal Viewpoint  (Westminster, Md: The Naman Press, 1963), 91.
41)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 173.
42) Calvin, Institutes,Ⅳ, 17, 11.
43) 이종성, ‘칼빈’(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152.
44) Calvin, Institutes, Ⅳ,17, 43.
45) 위의 책, 44.
46)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 167.
47)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 187-88.
48) 위의 책. 187-88.
49) 정장복, ‘예배의 신학’, 156.
50) 위의 책, 157.
51) 위의 책, 158.
52)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 168.
53) 위의 책, 169.
54) 조영엽, ‘교회론’, 166.
55) R.B. Kuiper, The Body of Christ, 353.
56) 위의 책, 354.
57) 위의 책. 354.
58) 요한복음 4:23.
59)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 168.
60) 위의 책. 168.
61) 고린도전서 14:40.
62)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 169.
63) R. 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 359.
64) 위의 책, 360.
65) 정성구, ‘실천신학 개론’, 172-73.
66)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 280.
67) De Jong. James A, Perspectives on Reformed Worship, 황규일 역, ‘개혁주의 예배’(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19.
68) 위의 책. 19.                                    
69) 장영일, ‘구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 장신논단 제10집(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18.
70) 시편 18:46, 28:6, 31:21, 41:13, 66:20, 68:19,35, 72:18,19, 89:52, 106:48 등
71) 시편 16:7, 26:12, 34:1, 72:15, 66:8, 68:26, 96:2, 100:4, 103:1,2,20,21,22 등
72) 장영일, ‘구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 장신논단 제10집, 19.
73) 위의 책, 19-20.
74) 시편 26:7, 42:4, 50:14,23, 56:12, 69:30, 95:2, 100:4, 147:7, 예레미야 17:26, 33:11.
75) 시편 28:7, 42:5,11, 43:4,5, 45:17, 67:3,5, 71:22, 76:10, 86:12, 89:5 등
76) 장영일, ‘구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 장신논단 제10집, 20.
77) 시편 63:3; 106:47; 117:1; 145:4; 147:12.
78) 성종현, ‘신약에 나타난 찬양과 오늘의 찬양’, 장신논단 제10집(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4), 72.
79) 위의 책. 72.                                          
80) 위의 책, 73.
81) 이윤영, ‘개혁주의 찬송가학’(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3), 64.
82) 김경선, ‘찬송가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62.
83) 장영일, ‘구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 장신논단 제10집, 13.
84) Judson. Cornwall, Praise, 배한숙 역, ‘찬양’(서울: 두란노서원, 1989), 62.
85) 성종현, ‘신약에 나타난 오늘의 찬양’, 장신논단 10집, 88.
86) 위의 책, 73-77.
87) 위의 책, 91.
88) 위의 책, 92.
89) 위의 책, 54-58.
90) 홍정수, ‘교회음악 개론’(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7.
91) 위의 책, 38.
92) 칼빈의 ‘시편 노래’로는 ‘스트라부르크 시편 노래’(Strasbourf Psalter)와 최초의 프랑스 운율 시편 노래인 ‘제네바 시편 노래’가 있다.
93) 조숙자, 조명자 공저, ‘찬송가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2), 89-105.
94) 기독교 대백과사전 편찬위원회, ‘기독교 대백과사전’ 제16권, 770.
95) 위의 책. 770.
96) 러버트 E. 웨버, ‘예배의 역사와 신학’, 225.
97) 조숙자, 조명자 공저, ‘찬송가학’, 130.
98) 박명섭, ‘교회음악’(서울: 교회음악, 1984), 23.
99) 조영엽, ‘왜 열린예배는 잘못되었는가?’ (서울: 도서출판 미스바, 2001), 241.
100) 홍정수, ‘교회음악 개론’(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8), 35-36.
101) 위의 책, 37.
102) 루터의 대표적인 곡은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103) 주숙일, ‘찬송의 향기를 온누리에’(서울: 싱코이노니아, 1993), 117
104) 이런 시편 노래는 찬송가 17장 ‘내가 한 맘으로’라는 곡 외에 몇 곡이 더 있을 뿐이다.
105) 이중태, ‘예배와 교회음악’ (서울: 예찬사, 1988), 9-12.
106) 정정숙, ‘찬송가학’(부천: 서울신학대학출판부, 1991), 19-20.
107) 위의 책, 20-21.
108) 문덕준, ‘찬송가학’(서울: 교회음악사, 1989), 33.
109) 김경선, ‘찬송가학 개론’(서울: 영음사, 1985), 17-18.
110) 정정숙, ‘찬송가학’, 25-28.
111) 김경선, ‘찬송가학 개론’, 48-54.
112) 최일인, ‘찬송가, 복음찬송가, 복음성가의 분류에 대한 소고’, ‘예배음악’ 통권 4호(1992. 7. 8호): 59.
113) 김경선, ‘찬송가학 개론’, 27.
114) 위의 책, 19.
115) 위의 책, 21.
116) 김두완, ‘교회음악 개론’(서울: 아가페음악선교원, 1986), 56.
117) 위의 책, 57.
118) 최시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1), 202.
119) 위의 책, 203.
120) 위의 책, 204.
121) 이문승, ‘한국 찬송가의 실태와 그 과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33-36.
122) 최시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214.
123) 위의 책, 216-18.                                          
124) 위의 책, 92-100.
125) 곽상수, ‘통합찬송가 비판’, ‘교회음악’ 통권33호 (1984. 10): 12-20.
126) 구두회, ‘새로 역어진 한국 찬송가를 보고서’, ‘교회음악’ 통권33호(서울: 교회음악사, 1984), 19-29.
127) 김하진, ‘예배와 교회음악에 관한 연구’(서울: 월간목회사, 1989), 291- 95.
128) 곽상수, ‘교회음악’ 통권33호, (1984. 10): 13-18.
129) 정장복, ‘예배학 개론’(서울: 종로서적, 1985), 239-45.
130) 위의 책. 241-45.
131) 정장복, ‘1991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서울: 홍익사, 1990), 18-24.
132) 정장복, ‘예배학 개론’, 248-50.
133) 정장복,  ‘1991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21-25.
134) 위의 책, 26-30.
135) 문덕준, ‘교회음악과 과제’, ‘교회음악’ 제15호 (1979, 3): 47-50.
136) 위의 책, 32-35.
137) 이의용, ‘잃어버린 찬양을 찾아서’(서울: 일지각, 1991), 40.
138) 위의 책, 43
139) Jack R. Taylor, Hallelujah Factor, 이석철 역,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서울: 요단출판사, 1993), 22.
140) 조영엽, ‘교회론’, 383.
141) Sorge. Bab, Exploring Worship, 최혁 역, ‘찬양으로 가슴 벅찬 예배’(서울: 도서출판두란노, 2000), 76.
142) 위의 책, 85.
143) 김경선, ‘찬송가학’, 36.
144) 창세기 35:22.
145) Sam Hinn, 안준호 역, ‘예배에로의 부르심’(서울: 도서출판 예인, 1997), 90.
146) 위의 책, 91.
147) 강문호, ‘성막’(서울: 한국 가능성 계발원, 1993), 83.
148) 민수기 2:9.
149) Harold M. Best, Music through the eyes of faith, 하재은 역, ‘신앙의 눈으로 본 음악’(서울: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5), 89.
150) 조영엽, ‘왜 열린예배는 잘못되었는가?’, 51-58.
152) 최 혁, ‘나의 찬송을 부르라’(서울: 규장, 1994), 17.
153) Judson. Cornwall, Praise, 배한숙 역, ‘찬양’(서울: 두란노서원, 1989), 27.
154) 위의 책, 29.
155) 김경선, ‘찬송가학’(서울: 대한기독서회, 1980), 49.
156) 최광덕, ‘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인피니스, 1997), 56.
157) Judson. Cornwall, Praise, 109.
158) 정성구,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 ‘신학지남’ 통권211권 (1987. 봄호): 37.1
159) Jack R. Taylor, Hallelujah Factor, 이석철 역,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31.
160) 조숙자, 조명자 공저, ‘찬송가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6), 90-91. ‘재인용’.
161) 김소영, ‘예배와 생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