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칼빈의 성경주석을 통해 본 창조신앙에 대한 이해

칼빈의 성경주석을 통해 본 창조신앙에 대한 이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본 글의 관심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성경이 진술하는 창조에 대한 이해를 전체적으로 그려보려는 데 있으며 또 칼빈의 그 같은 이해가 갖는 목회적 관심을 서술하고자 하는 데 있다.

1. 창조신앙과 칼빈

성경이 진술하는 창조(創造)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창조신앙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다. 칼빈은 창조에 대해 “중요한 것은 세계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칼빈은 철저한 창조신앙 자였으며 그의 창조신앙은 성경 중심의 성경대로의 창조신앙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성경 이외의 다른 것에 근거한 창조론이나 만물 기원론에는 반대하며 비판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칼빈은 천사나 마귀 같은 무형의 존재들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상상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전에 이방 신을 숭배했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하나의 우화일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칼빈은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예술가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배열하여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분이시다.”라고 말했다.  

그러기 때문에 칼빈은 창세기 1장의 주석을 마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물이 균형과 조화 면에 있어서 덧붙이거나 제할 것이 하나도 없는 가장 완벽한 것임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칼빈은 이 같은 서론적 진술에서도 그의 목회적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서 피조물을 통해 보여주신 그 명백한 권능을 아무 생각 없이 잊어버리거나 그냥 넘겨 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누가 마음에 감동받을 정도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라는 걸 이해하는 참된 신앙이 있다.”라고 하여 칼빈은 창조신앙과 관계하여 자기 나름대로 참된 신앙에의 척도(尺度)를 제시했다.

칼빈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사를 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과 은혜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주신 큰 은사에서 느끼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분명히 주님은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잠겨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부요하심을 바로 보게 될 때 그것들을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했다.

2. 창조신앙과 성경의 중요성

이 같은 창조신앙에 있어서 성경이 참으로 중요한데 칼빈은 창조 신앙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안경’에 비유했다. 이것은 그가 즐겨 애용하는 비유인데 이 경우의 안경은 시력이 조금 나쁜 사람이 쓰는 안경이 아니라 시력이 아주 나빠서 그 안경이 아니고는 사물을 크게 잘못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쓰는 그런 안경을 가리킨다.      

또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 비유했다. 이와 유사한 비유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거나, ‘새로운 치료 방법’과 ‘새로운 도움으로서의 성경’이라거나, ‘우리의 안내자요 선생’으로서의 성경이란 표현들이다.

더욱이 성경 가운데도 이 주제와 관계하여서는 창세기의 가치가 단연 두드러져 보이는데 칼빈은 “모세가 기록한 이 첫 번째 책은 다른 것과 비교가 될 수 없는 보화로서 간주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면 이 책은 최소한 이 세상의 창조에 관하여 도저히 논박의 여지가 없는 확신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만약 하늘과 땅의 침묵 교훈으로 충분했다면 모세의 교훈은 불필요했을 것이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은 그분 자신의 생생하고 명백한 모형이기 때문에 그는 이 점에 대해 우리를 환기시키고 있다.”라고 했다. 칼빈은 히브리서 11:3을 인용 “그리하여 믿음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다.”라고 함으로써 사도의 주장을 확증하고 있다.

3. 모세 저작으로서의 창세기 

칼빈은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이미 그 당시에 모세의 저작설에 반대하여 제기된 다양한 논의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논의들에 대해 그러한 논의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모세는 자기가 기록한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며 그렇다고 글을 읽어보고 그 진리들을 배운 것도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해 “모세가 기록한 이 첫 번째 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 형상을 보여주는 거울로 우리 앞에 두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모세가 창조주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의 확실한 증인(證人)이며 사신(使臣)이었다.”고 변증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은 장래 일을 알고 예언했는데 이미 지난 일에 대해 말하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겠는가?” 반문하며 “먼 미래에 될 일을 그리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시대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성령의 도움으로 미리 볼 수 있었던 그에게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역량이 없었겠는가?”라고 했다. “특별히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을 우리가 감안(勘案)하면 충분히 그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을 것이다.”리고 논증했다.

이 밖에도 창세기의 모세 저작과 관계하여 “그가 여기서 그 자신의 예견을 제시하지 않고 다만 모든 인간이 알아야만 될 중요한 일들을 책으로 엮어서 알리기 위하여 그는 성령님의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거나 “그가 최초로 기록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모세에 대해 “그는 우리들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감탄을 전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모세가 기록한 내용에 대해 칼빈에 의하면 모세는 그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낯선 어떤 것이 아니라 “창세기는 그들 가운데서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또 “(모세가) 모든 사람이 전에 전혀 듣지 못한 일들을 기억하도록 전한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기나긴 세월을 내려오면서 그의 조상들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전하여 결국은 자손에게 전달했던 사실들을 그가 최초로 기록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이같이 아담 이후 모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유기적으로 전승(傳承)되어 왔다는 것을 은연 중에 전제하고 있다. 심지어 칼빈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모세 시대 훨씬 이전에 계약에 대한 지식이 있었는데 그 같은 지식은 모든 백성에게 보편적이었다.” 칼빈은 창조의 지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세상의 창조가 고대와 조상들의 항구적인 전통을 통하여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건설자 이시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선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해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우며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과 (특별히 인류에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배려가 얼마나 감탄할만한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또 창세기의 내용에 대해 칼빈은 “모세가 세상의 창조로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그 주제에만 제한하고 있지 않다.”라고 관찰하고 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철학적인 통찰력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미개인들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것들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여 성경이 어떤 특수한 분야의 언어로 기록된 게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로 보편성 있게 기록 된 것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창세기의 기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인데 “그것의 순수성을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 역사를 기록하게 하는 것을 기쁘게 결정하신 것이다.”라고 한다. “성경을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혀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들을 깨닫도록 거의 강요하고 계신다.”라고 했다.

 칼빈의 창세기 기록 목적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그의 역사 이해와도 연관되는데 그에 의하면 “이 역사의 전체 영역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신 그분의 특별한 배려를 나타내셔서 인류가 그분에 의하여 보존돼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창세기 기록방식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창세기를 마치 과학 서적처럼 대하려는 자세에 대하여 경계를 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칼빈은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미개인들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것들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하여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과학적인 언어나 철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로 대하고 읽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주석에서 “여기서는 철학적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해와 달이 어느 정도 밝게 우리게 비추는지 말하고 있다.”는 표현이나 “모세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 한 문체로 기록했으나 천문학자들은 인간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다.”거나 “모세는 알기 쉬운 표현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는 “모세는 우리를 모두 신비한 하늘 세계로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모든 것이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칼빈은 모세가 “유식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교육방법을 택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라.”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 관심을 읽을 수 있는데 칼빈은 이 세상의 창조에 관한 “확신이 없이는 우리 인간은 이 지상에서 살 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하여 이 세상의 창조에 관한 확신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또 그는 “달로 인해 밤이 밝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도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달빛을 악하고 배은망덕하게 사용하는 자들은 정죄 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창조세계에 산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또한 그 당시의 철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이러저러하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철학자로서 이 우주 창조자의 기교에 대하여 추론하는 것은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 그가 제시한 우주 기원에 대한 해결책은 “복음의 말씀으로 먼저 겸손해져서 자신들의 지적인 지혜를 완전히 십자가의 미련함에 맡기는 것을 터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세상 창조의 오묘(奧妙)함을 추론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4. 창조 기록에 대한 모세의 의도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재미있는 추정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그 기록에 대한 모세의 의도를 짐작해 본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세의 의도요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의도라 할 수 있겠다. 그에 의하면 모세의 책에서 그의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가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오직 그분의 사역들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기를 원하는 자와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다른 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오직 여기서 밝혀지고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게 전세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입증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데 전력을 쏟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본질만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은 왜곡된 탐구가 아닐 수 없으며, 자연을 주어 우리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고 계시는 창조자를 인정치 않은 채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향유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배은망덕(背恩忘德)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에 대해 알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우리 눈앞에 천지의 조직을 펼쳐 놓으셨다. 왜냐면 우리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오직 그분의 사역들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하늘과 땅의 조직에 전시돼 있으며 하나님은 세상의 모형으로 자신을 옷 입히고 계신다. 그런 세상의 모형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제시하셔서 우리가 관조할 수 있게 하시는데 우리는 천지의 비교할 수 없는 의복으로 장관을 이루는 성장을 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려고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모세는 “이 선포로 우리 자신들의 주의를 자극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려고 우리로 이 자연의 장면에 배치하신 사실을 우리로 인식하게 하려고” 접근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단순한 증거들로 보지 말고 동시에 이 자연에서 전시되고 있는 모든 풍요를 향유하게 하시며 또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배치시키신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그는 접근하고 있다.”라고 했다.  

 칼빈은 모세를 가리켜 ‘우리의 스승 모세’라고 불렀는데 “그는 우리들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감탄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모세는 별들보다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두고’ 창세기를 기록했으며, 칼빈은 모세가 평범한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은 모든 사람을 위해 학교를 개방하여 모두 익히 아는 내용을 택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5. 성경에 대한 칼빈의 절제 

성경을 주석하는 일에 있어서나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칼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적당한 데서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표현대로는 ‘절도와 적정의 원리’에 해당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관계된 일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모두 공허(空虛)한 사색을 떠나야 하는데 “그분의 뜻이 모든 지혜의 척도가 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만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창조세계를 논하면서 그 논의가 창조주에 대하여 미치게 될 때 그는 “하나님 존재의 영원성과 그분 영광의 무한성은 둘 다 모두 이중적인 미궁을 입증해 주고 있기에 우리는 공손하게 여호와의 인도와 지시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 이상은 추구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만족시키자.”라고 하여 그 적절한 선에서 멈추기를 권고하였다.

실례로 그의 주석에서 궁창(穹蒼) 위의 물에 대하여 설명을 시도하면서 그는 “공연하고 명백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파고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려고 의도적으로 감추어 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못 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이다.”라고 비난하는 데 대하여 “저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한하기를 원하시는 울타리, 그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물자!”라고 우리에게 권했다.  

칼빈은 특히 창조세계의 기원에 대해 사색하면서 “신앙의 단순성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이러한 절도와 적정의 원리가 철저히 말씀의 기준에 따라서 세워져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6. 우선순위 또는 선결문제

칼빈은 창조세계의 비밀에 대하여 논하는 것과 관계하여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 신앙을 꼽았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말씀으로 먼저 겸손해져서 자신들의 지적인 지혜를 완전히 십자가의 미련함에 맡기는 것을 터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세상 창조의 오묘함을 추론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며, “철학자로서 이 우주 창조자의 기교에 대하여 추론하는 것은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확신하기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나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방법을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불가시적인 왕국이 모든 것을 채우며, 그분의 영적인 은혜는 모든 것을 통하여 발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신학자로서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다.”라고 하며, 신비에 속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확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창세기 주석에 대하여 창세기를 간결하게 다룬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부분은 성실하게 주석하였다고 하였다.  

 마치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 기술된 창조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그의 목회적 관심에 대하여 말했다. 먼저 칼빈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창조신앙에 대하여 말하였고, 다음으로 창조신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말했다.

지금껏 논의된 글들에서는 ‘칼빈의 창조론’이라는 제목 하에 혹은 보다 더 전문적이고 신학적인 논의를 하거나 보다 더 포괄적인 정리를 한 데 비해 본 글에서는 ‘칼빈의 창조론’이라는 제목보다는 ‘성경이 진술하는 창조에 대한 칼빈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그 관점을 바꾸어 보다 포괄적으로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이 주제와 연관된 목회적 관심이란 면이 본 글의 주요한 특성이 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보통은 창조론 역시 하나의 논(論)에 그치기 쉬운데 여기에다 목회적 관심을 연결하므로 보다 실천적인 관심이 있는 글이 되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칼빈은 목회적 관심이 충만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목회적 관심이 없이는 신학을 논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요 동시에 탁월한 신학자였다. ‘칼빈의 창조론’에 대한 글도 그다지 많지 않은데 거기에다 목회적 관심까지 연결을 시켜 이 글은 이 분야에서 처음 쓰게 되는 글이 된 셈이다. 그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미숙한 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계속해서 이러한 관심으로 칼빈의 글을 살핌으로써 이 논의를 보다 풍요하게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 글쓴 이 /  김성봉 박사(신반포중앙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