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요약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 요약(25) 하나님의 예정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1항 – 제24장 17항)
제23강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따른 영원한 작정

  1. 영원한 선택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인함을 믿는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인류의 창조와 더불어 작정 된 하나님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의 섭리(攝理) 또한 찬미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作定)’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하셨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오직 택함 받은 사람만이 예정 교리의 유용성을 깨닫고 가장 달콤한 구원의 열매를 맛본다. 예정 교리는 우리에게 세 가지 유익이 있다.

첫째, 예정의 교리를 알기 전에는 영원한 선택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샘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둘째, 이 가르침으로 인하여 ‘값없는 선택’에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선택의 은혜는 행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11:5,6) 선택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셨기 때문에 치르시는 값이 아니다.

셋째, 예정의 교리를 맛본 사람만이 ‘진정한 겸손’에 이르게 된다. 영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그분의 손으로부터 앗아갈 자 아무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또한 그분 아버지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요 10:28,29)

예정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깊이 감추어 두신 ‘가장 고상한 지혜’이다. 이 지혜의 영원성을 그 자체로 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단지 미로(迷路)로 이끌릴 뿐이다. 하나님 자신의 은밀한 뜻은 오직 그 분 자신의 말씀으로만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이로운 교리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경외해야 할 것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1항)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경박하고 위험한 호기심은 오히려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막고 우리를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만들 뿐이다.(욥 12:24) 어거스틴은 예정의 진리는 우리가 왕의 침실로 나아가게 되는 지식과 지혜의 보화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을 견지해야 한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2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의 교리를 암초와 같이 여기지는 자들이 있다. 성령의 학교로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친히 입을 여신다. 우리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를 함께 열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화’라고 함은(잠 25:2) 오묘한 일이 그분께 속하였다 함이요 그것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우리는 예정의 진리에 대해서 ‘짐승 같은 무지’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3항) 예정은 성경이 가르치는 주요한 믿음의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비밀로 감추신 영역은 그대로 두고 받아들이되 반대로 알려주신 것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4항)

  1. 선택(選擇)과 유기(遺棄)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말한다. 이로써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주어진다. 각 사람은 이 중에 한 길에 서게 됨으로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죽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여졌다. 이러한 선택은 개인적이지만 간혹 그 섭리는 여호와의 분깃으로 택하신 백성 단위로도 선포된다.(신 32:8,9)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후손을 오직 거저 베푸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택하셨다.(신 4:37, 7:6-8, 10:4,5, 23:5, 시 47:4)

선택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들로부터 찾는 것은 무모하다. 이러한 은혜는 그저 베푸시는 언약의 원리로부터만 흘러나온다.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 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선택의 이유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야곱의 후손을 자신의 기업으로 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복이 있다.(시 33:2, 105:6, 42)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오직 주께서 긍휼히 여기사 택한 백성이 주의 뜰에 거하게 되니”(사 14:1, 시 65:4) 그 은혜의 비밀이 하나님의 뜻에만 있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5항)

역사상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그분의 선택은 어떤 법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다. 선택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므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사랑하셔서 다른 민족들보다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 그리고 한때 전체로 택함받은 민족들 가운데서도 또 어떤 사람은 두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 즉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말 1:2,3, 롬 9:13) 둘 다 이삭의 아들로서 언약의 후손들이었지만 은혜의 놀라운 비밀에 따라 야곱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에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나타난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6항, 22장 4항)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이스라엘 자손을 택했지만 그중 남은 자들에게만(롬 9:27, 11:5, 사 10:22,23) 중생의 영을 부어주신 것은 구원이 혈육에 따르지 않고 언약을 좇아 그분의 자비에서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 만이(갈 4:28)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된다. 이방인도 이스라엘의 수(數)에 들게 되니(신 32:9, 왕상 8:51, 시 28:9,33:12) 이는 선택의 은혜가 지체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을 영적인 후손들에게만 있음을 구약시대에 미리 예표 함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영생’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벌’로 부르신다. 바로 이러한 부르심이 선택의 증거이다. 부르신 자는 의롭다 하시고 거룩한 길에 서게 하시고 종국적으로 영화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구원으로 받아들이심과 멸망 가운데 버려두심에 있다.(기독교강요 제3권 21장 7항)

  1. 예지 예정론 주장에 대한 반박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의 인간적인 공로(功勞)를 미리 아시고 즉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豫知)하시는 자들을 자녀로서 선택하셨다는 ‘예지(豫知) 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왜곡한 것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자질을 헤아리시고 그 예지(豫知)에 따라 작정하셨다는 교설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밝히 증거 하는 진리이다. 천사들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록 원죄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으나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되심이 영원히 정하여졌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지체들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성경에 명백하다. 이는 그들의 가치 여하를 불문하고 택하심이니 택자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분의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예지’(豫知)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기독교강요 제2권 21장 5항, 22장 1항)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이 있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무조건적 선택을 뜻한다. 사람의 가치(價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믿는 은혜만이 역사한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으므로 택함 받는 자의 자질이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목적이 있지만 ‘그의 기쁘신 뜻대로’ 가 하나님 선택의 더욱 우월한 원인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1항)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은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는다.(딤후 1:9) 즉 구원의 작정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는다.(롬 9:11)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에 따라서(엡 1:5,9)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를 자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도구로서 삼고자 하심이다.(엡 1:6,12,14) 즉 성도의 거룩함은 선택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거룩함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양자(養子) 삼으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은 부르시고 이스마엘과 에서는 부르시지 않았다.(창 21:12, 25:23) 하나님이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 원인을 그분의 은밀한 선택 외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우리의 전적 무능과 부패를 다 아시고 선택하셨다. 공로로 말하면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며 다르지 않다. 다만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 않은 것이 다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출 33:1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신다고 함은(롬 11:2, 행 2:33) 그 분께서 자질을 헤아리시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시사 미리 정하신 백성을 마음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구속 주로 정하신 하나님이(벧전 1:19,20)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롬 9:23) 삼으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기독교강요 제2권 22장 4-6항)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의 비밀을 친히 말씀하셨다. 택함을 받은 자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즉 ‘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셨다.(요 6:37,39, 15:19, 17:6,9)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백성을 자신께서 택하셨다고 하심으로써(요 13:18) 함께 일하시고 경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셨다. 창조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협약하셔서 아들을 보내시사 아버지께 속한 백성을 끝까지 보전하시도록 하셨다.(요 17:11,12)

우리가 아들을 믿고 아들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양자됨이 오직 아버지의 은밀하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7항)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이런 아퀴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선택이 사람의 공로에 종속된다.(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9항)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의 헤아리심과 긍휼에 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자질로 선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다면 결국 우리가 먼저 그분을 선택한 것이 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을 받아야 할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8항)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있다.(요 1:12,13)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아버지를 본다.(요 6:46) 먼저 보내심이 있고 믿음이 따른다.(요 6:39,40)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만이 영생에 이르는 소망이 된다.(딛 1:1,2) 믿음은 선택의 ‘보증’이 된다. 선택이 ‘믿음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불변하는 항구성에는 견인(堅忍)의 은혜가 함께 주어진다.(기독교강요 제3권 22장 10항)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소위(所爲)를 앞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를 주신다.(기독교강요 제3권 24장 3항)

  1. 공로 없는 은혜와 마땅한 형벌

예정의 경륜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 아무도 신적 경륜을 두고 이유를 물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함에 대한 최고의 규준이며 모든 법 중의 법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3장 2항) 진흙이 토기장이와 쟁론하여 그릇의 어떠함을 다툴 수 없다.(롬 9:21-23) 그러하듯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하나님의 유기(遺棄)가 없다면 하나님의 선택도 없게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23장 1항)

오묘한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을 유한한 사람의 잣대로 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을 다 헤아릴 수 없다.(롬 9:19-23, 11:33) 그러므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무지(無知)가 무모한 지식(知識) 보다 낫다. 누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을 알되 그 밑바닥까지 미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일을 예지(豫知)하시되 그냥 방임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작정대로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사물들의 필연성’이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고 행하신다.(시 115:3) 사람의 넘어짐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다만 사람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넘어진다.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지만 그 원인은 그분의 예정에 있지 않고 사람의 불순종에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이 무책임한 사람을 만든다는 비난은 합당하지 않다.(기독교강요 제3권 23장 2-9항)
또 하나님의 예정은 편파적이지 않다. 구원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나 성품에 따른 차별이 없다.(갈 3:28, 약 2:5, 골 3:25, 엡 6:9) 선택과 유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역사할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유기된 자들에게는 마땅한 형벌을 내리신다. 그러나 선택된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공로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주께서는 자비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으나 심판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값없는 은혜를 나누어 주시지는 않는다.(기독교강요 제3권 23장 10,11항, 24장 8-17항)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사람들의 의지(意志)를 사용하셔서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는 사람마다 반드시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살전 4:3, 엡 1:4, 2:10) 주의 마음을(롬 11:34) 알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은 만인에게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기독교강요 제3권 23장 12-14항) 하나님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부르심과 선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확신되는 내적인 소명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된다.(기독교강요 제3권 24장 3,8항)

만세 전의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되었다. 전가(轉嫁) 된 그리스도의 의(義)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무의미하다. 오직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와 값없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 즉 그리스도 보혈의 값으로부터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버나드가 말했듯이 “하나님 자신께서 나에게 전가하시려고 작정하지 아니하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시며(요 6:35) 그 떡을 먹는 자마다 죽지 않는다.(요 6:51,58) 오직 그분을 믿는 자마다 그분의 떡을 먹는다.(요 3:16) 우리는 그의 양이며 그분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요 10:3)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신다.(요 6:37,39, 17:6,12) 그리고 주님은 끝까지 자기의 양들을 지키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다시 내어 쫓김이 없으며(요 6:37), 하나도 버림이 되지 않으며(요 6:39), 아무도 뽑히지 않는다.(마 15:1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백성만이 견인의 은혜를 누린다. 영원한 구원의 작정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으므로!(기독교강요 제3권 24장 4-7항)(*) 글쓴 이 / 문병호 교수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