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50) 일본 무교회주의와 김교신

‘성서조선’ 잡지 창간 동인들(1927년 2월) 양인성 함석헌 송두용 김교신 정상훈 유석동(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일본의 토착적(土着的)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Non-church movement)가 소개되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은 물론 일본의 식민지 상태였기에 일본의 무교회주의가 수용되기에 용이한 상황이었다. 신학서적이나 성경주석 등 기독교문서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국의 목회자들은 일본 무교회주의자들의 문서를 쉽게 그리고 깊게 접하게 된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비롯한 쓰가모토 토라지(塚本虎二), 구로사키 코우키치(黑崎辛吉), 난바라 시게루(南原繫), 야나이하라 타다오(失內原 忠雄), 이토 유우시(伊藤祐之), 마사이케 메구무(政池仁), 모리모토 케이조(森本慶三), 스즈키 수케요시(鈴木弼美), 후지사와 타케요시(藤澤武義) 등은 주석을 출간하거나 성경연구를 위한 개인잡지를 발간했다. 이런 무교회주의 일본 서적이 한국에 그대로 소개되었으므로 일본의 무교회주의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 수용될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 한국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무교회주의자들의 문서를 접해보지 않는 이들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주기철 목사도 쓰가모토의 주기도문에 관한 연구인 ‘主の祈の硏究’를 토대로 주기도문을 강해했을 정도였다. 손양원 목사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서적을 탐독하였고 이들의 저술을 기초로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경남노회에서 논란을 빚은 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이었다. 1901년 3월 30일 함경남도 함흥의 사포리(沙浦里)에서 출생한 김교신은 함흥공립보통학교(1916)와 함흥공립농업학교(1919)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의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던 1920년 4월 우시코메구에서 마쓰다(松田)라는 노방전도자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산상수훈을 통해 기독교의 가르침이 유교 이상으로 고엄(高嚴)하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孔孟之道)을 버리고 그해 6월 27일 야라이초(失來町) 성결교회에서 시미즈 순조(淸水俊藏)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내분이 일어나 스미즈 목사가 반대파의 음모와 술책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약 6개월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김교신은 이때가 자신의 신앙생활의 일대위기였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내적 갈등을 겪었다. 이런 경험이 무교회주의에 집착하게 된 전기가 된다.

무교회주의란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신앙 형태로서 복음적 신앙을 따르지만 제도화된 교회 구조를 반대한다. 무교회주의는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교권주의(敎權主義) 교회 구조’를 거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교권적인 교회구조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자유교회 혹은 독립교회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면서 성경 중심주의 바탕에서 개인 전도를 강조하며 문서전도와 가정 집회를 통해 일본의 복음화를 추구했던 일본의 토착적 기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의 애국적 정신은 자신의 성경책에 영문으로 써 두었던 글 속에 드러나 있다.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위하라.”(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사진 / (좌) ‘조선성서’ 잡지 표지, (우) 김교신

  기성교회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낀 김교신은 1920년 우치무라 간조를 알게 되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신앙과 성경을 배우게 된다. 이때 한국인 동료 유학생이었던 류석동(柳錫東) 송두용(宋斗用) 양인성(楊仁性) 정상훈(鄭相勳) 함석헌(咸錫憲) 등을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된다.

김교신은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1921) 도쿄의 고등사범영어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에 지리 박물과(博物科)로 전과했다. 1927년에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이과 제3부(甲組)를 졸업하고 4월 귀국길에 올랐다. 조국으로 돌아온 김교신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한편 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 등과 민족구원의 꿈을 안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무교회 신앙잡지였다. 이들은 우치무라 간조가 강조했던 방식으로 ‘성경을 조선 위에’(The Bible on Korea), ‘조선을 성경 위에’(Korea on the Bible)라는 취지에서 ‘성서조선’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성서와 조선을 접속사로 엮은 것은 조선의 소망은 오직 성경에 있고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정립한다는 의미였다. 1930년 5월부터는 김교신 자신이 주필이 되어 편집책임을 맡았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들의 경우처럼 사실상 개인잡지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 잡지는 한국에 무교회 신앙을 소개하는 통로였다. 이 잡지에 연재됐던 함석헌의 ‘성서로 본 한국역사’가 후일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김교신은 후일 함흥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보통학교로 옮겨가지만 성서조선 발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2년 3월 발간된 ‘성서조선’ 158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문제시 되어 결국 강제 폐간 당하게 된다. 죽은 개구리를 슬퍼한다는 의미의 이 글은 비상한 혹한에 개구리마저 얼어 죽었지만 담수(潭水)에 살아있는 개구리가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일제의 강압통치 하에서도 민족혼은 살아있다는 점을 시사했다하여 김교신을 비롯하여 송두영 유달영 함석헌 등 13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43년 3월 29일 출옥한 김교신은 1945년 4월 25일 44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러나 그와 동지들의 열정으로 1930년대 한국에 무교회 신앙이 뿌리 내리게 된 것이다.(*) 글쓴 이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  

조와(弔蛙)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끓어 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도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권두언, 이 글로 잡지는 폐간 되고 김교신은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