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55)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궁성요배(宮城遥拝)는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들의 주민들이 고쿄(궁성)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던 예법을 가리킨다. 궁성요배는 일본 제국의 내지(일본 제국의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외지(일본 제국의 식민지),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 어디서든지 가능했다. 타이완에서는 황성요배(皇城遙拜), 조선에서는 황거요배(皇居遙拜), 만주국에서는 동방요배(東方遙拜)라고도 했다.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기독교계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점차 교회와 교회 기관으로 확대되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시련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의 부임으로 발화(發火)되었다면 교회에 대한 강요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의 부임으로 방화(放火)되었다.

조선총독은 천황(天皇)으로부터 직접명령을 받아 조선을 통치하는 절대 권력자였다. 당시 “조선총독이 하지 못하는 일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뿐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는데 이 절대 권력을 노골적으로 행사한 인물이 미나미 지로였다. 미나미는 만주사변 당시 육군대신이었고 그 후 관동군 사령관 겸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에서부터 시작하여 1932년의 상하이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그리고 1941-1945년까지의 태평양전쟁을 총칭하여 ‘15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기간 동안 최전선에서 지휘하고 1936년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 이기풍 최봉석 최상림 목사와 박관준 장로(왼쪽부터)

그의 군대 지휘관으로서의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군국주의적 식민통치자로 조선을 완전한 천황의 나라(皇土)로 만들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신사참배 강요를 황민화정책의 가장 우선하는 정책으로 보았다. 황국신민서사 제창, 궁성요배, 일장기 게양도 그가 추진한 정책이었다. 이제 그의 부임과 함께 신사참배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시국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7월에는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1945)이 발발하였고 일제(日帝)는 9월 6일을 애국일(愛國日)로 정해 일본국기 게양, 황거요배(皇居遙拜),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였고, 12월에는 천황의 사진을각급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경배를 강요했다. 특히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 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神社)를 건립했다. 또 1938년 2월에는 전쟁수행을 위한 특별지원제인 징병제(徵兵制)를 제정하였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이 같은 일련의 강압통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용하든지 거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듯 했으나 곧바로 굴복했다. 교황 비오 11세(Pope Pius XI, 1857-1939)는 1936년 5월 26일 훈령을 통해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간주하고 충성심과 애국심의 표시라며 참배를 허용했다. 천주교는 점증하는 일본세력에 대해 타협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주교는 신사참배는 물론이지만 조상제사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했다.

개신교회 중 장로교 다음으로 교세가 컸던 감리교도 굴종(屈從)의 길을 갔다. 이미 1936년 6월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梁柱三, 1879-1950, 사진)은 총독부가 주관한 초청좌담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입장에 순응하기로 했다. 1938년 9월 3일에는 총리사 양주삼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그 외에도 구세군, 성결교, 안식교,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회들도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다. 끝까지 저항한 교회는 오직 장로교뿐이었다.

그러나 장로교도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했으나 강요가 심해지자 점점 그 의지가 약화되어 갔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탄압과 압력에 굴복, “신사는 국가의식이므로 참배를 허용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렇게 되어 1938년 9월 이전까지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일제는 한국 최대의 교파인 장로교도 신사(神社)에 참배토록 하기위해 용의주도한 방법을 구사했다. 신사 참배 반대론자를 예비 구속시켰고 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기도 했고 친일세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일제는 1938년 9월에 있을 장로총회에서 신사참배 안이 가결되도록 하기 위해 은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친일적 목회자인 박응률(朴應律)에게는 신사참배 안을 제안하도록, 박임현(朴臨鉉)에게는 동의하도록, 길인섭(吉仁燮)에게는 제청하도록 요구하여 사전 내락을 받았다.

예정대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206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로교 제27차 총회가 열렸을 때 각본에 따라 신사참배 안이 상정되었고 이 안은 가부(可否) 절차가 생략된 채 ‘불법적으로’ 가결되었다. 일제의 압력과 총회장 안팎에서의 감시와 위협이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반대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가결을 불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사참배 안 처리를 사회자였던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가’(可)는 물었으나 ‘부’(否)는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불법적인 가결에 대해 선교사 방위량(WN Blair)과 그의 사위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가 항의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삼엄한 상황에서 신사참배 안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1938년 9월 10일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임원들

“아등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후’라는 말은 어자적으로 총(銃) 뒤(後)라는 의미인데 후방(後方)이란 의미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임으로 전쟁 수행중인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같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는 천황의 백성으로써 신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의 즉시 실행 요청에 따라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23명의 총회 임원은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큰 굴욕이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태양신 숭배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글쓴 이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