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성례가 우리의 믿음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

성례가 우리의 믿음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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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례는 두 가지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례(sacrament)는 오로지 세례와 성찬 두 개 뿐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굳이 성례를 7개(세례, 견진, 성찬, 고해, 결혼, 종유, 임직)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도 없다. 성경은 오로지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개의 성례만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유일한 성례라고 가르친다.

왜 성경은 굳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를 제정하셔서 사도시대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도록 하셨는가? 그 이유는 세례와 성찬이 우리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러 번 성례식에 참여 하면서도 성례식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는 점에 대하여 그다지 큰 도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형식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만 가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굳이 성찬에서 유익을 얻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필자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성례는 로마 가톨릭의 형식화된 성례와 그다지 큰 구분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로마 가톨릭의 성례식에 비하면 뭔가 약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개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성례가 결코 개혁주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 성례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개혁주의 정신에 비추어 바른 성례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개혁주의 성례를 가장 잘 가르친 책은 분명히 기독교강요이다. 기독교강요에서는 성례가 어떻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에 유익을 주는지 아주 자세하게 많은 분량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칼빈이 말하는 성례란 어거스틴의 말처럼 ‘눈으로 보이는 말씀’이라는 것이다.(기독교강요 4권 14장 6절)

다시 말해서 성례는 눈으로 보이는 말씀이므로 성례는 그 자체로서 눈으로 읽는 성경과 동일한 은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례가 눈으로 읽는 성경처럼 동일한 은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는가? 실제로 우리가 성례를 통해서 그런 효력을 느끼고 있는가? 사실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칼빈은 성례를 시행할 때 말씀을 통해서 성례에 대한 주님의 의도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성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례와 성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례는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새 언약의 상징으로 삼으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삼겠노라는 고백이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이제 필자는 이 성례가 우리의 믿음과 경건에 유익이 되도록 이해하는 개혁주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보겠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할 것은 좁은 지면상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기초로 말씀드리되 인용을 하는 일은 거의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좁은 지면에서 이 영광 스런 교리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이 미흡할 수 있다는 점도 양해를 구하고 싶다. 만일 이 글을 읽고 좀 더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분은 기독교강요의 4권을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3. 성례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성례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

우리는 두 개의 성례인 세례와 성찬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도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아 애굽의 생활로부터 구출을 받아서(세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의 생활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와 성찬을 요약한 핵심 메시지이다.

여기서 성찬은 성도가 영원한 천국에 가기 전까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오로지 하늘의 양식만을 의존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성찬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 6장이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성찬의 대상이라는 점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을 ‘하늘로부터 온 산 떡’이라고 가르치셨다.(요 6:50)

예수님은 이 떡(예수님의 살과 피)을 먹는 자마다 영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요 6:51)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가 불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성찬의 정신을 강론하신 것인데, 이는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부터 더 이상 애굽의 양식으로 생명을 유지하지 않고 하늘의 양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는 점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더 이상 이전의 애굽의 음식, 다시 말해서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으로 삶을 유지하게 된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늘 음식(만나)으로만 삶을 유지하는 백성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출애굽을 했다고 하더라도 만나(하늘 양식)로만 만족하지 않고 애굽의 음식으로 만족하려 하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비록 출애굽을 했다고는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애굽의 마늘과 부추와 고기와 수박에 있다면 마치 몸은 소돔을 나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소돔 성에 있었던 롯의 처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광야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서 애굽에서 죽임을 당한 애굽 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죽은 이들이 비록 히브리인이었지만 약속된 유업(가나안 땅)을 받는데 실패함으로써 이방인과 애굽 인처럼 취급된 것이다. 이는 혈통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요, 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요 1:13)

(2) 성례를 통해 명하신 것

1) 애굽 생활을 버리라!

세례와 성찬은 우리들에게 이런 놀라운 출애굽 사건을 반복하여 묵상하도록 한다. 세례와 성찬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만 양식을 삼는 사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반복하여 묵상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것을 생존의 의미로 여기며 성령의 소욕을 무시하고 산다면 결국은 광야에서 죽어간 히브리인들처럼 하나님께 영적 이방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요 6:63) 우리가 육체대로 살면(애굽의 양식)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하늘의 양식) 살 것이다.(롬 8:13) 그렇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와 같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성공과 쾌락과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는 맛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못하도록 한다.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반드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고백을 하며 살아야 한다. 참된 성도라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참된 양식이라고 날마다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은 광야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요구된 고백이었던 것처럼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동일한 고백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반복하여 성찬식을 하라고 요구하는 이유이다.

2)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리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사건을 기억한다. 이렇게 전도를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가져와 권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중략)…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2-34)

여기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제자들의 주된 양식이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참된 양식인 것이다.

성례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세례) 반드시 육신의 일로 양식을 삼지 않고, 오로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는 것(성찬)이 당연하다는 점을 반복하여 각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성례를 통해서 이 놀랍고 신비로운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성찬에 참여한다면 경건에 아무런 유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로마 가톨릭의 화려한 성찬식에 비하여 초라한 종교 형식으로 비춰지는 예식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예식을 염두에 두고 매번 성례에 참여한다면 반드시 경건에 큰 유익이 되며,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할 것이다.(*) 글쓴 이 /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