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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개요

역사적 관점에서 본 신구약 중간사 개요

시작하는 말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period)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 말라기 선지자에서 신약 세례 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읽고 마태복음을 펼친 독자는 순식간에 약 4세기를 뛰어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사자’1)를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 전까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침묵하셨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혹은 ‘중간기’(中間期)라고 한다.

(1)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王朝)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독자를 거대한 로마제국으로 안내한다. 독자들은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게 되고 수전절(修殿節, Hanukkah)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 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 이해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는 신구약 중간사의 의의와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중간사 기간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 강대한 왕도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크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했다.2) 

또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공회를 만나고,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읽으며, 서기관들의 활동을 대하게 된다. (중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타인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셋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상의 이런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신구약의 중간역사 때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와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3)

그러나 ‘중간사’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다. 자료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 H. 야거스마는 “이 기간의(편집자 주, BC 330년-AD 135년)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주 상당히 많은 불확실한 것들과 가정들로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기간 에 이스라엘 역사의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점이 그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4)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동시에 그는 ‘중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외경(外經, Apocrypha), 위경(僞經, Pseudographia), 필로의 저작, 요세푸스의 저작, 헬라와 라틴저작, 사해사본,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랍비 문헌, 고고학의 증거 등을 말한다.

(2)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성경은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인가?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14 AD)부터 소위 ‘오현제(五賢帝)’5)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叛亂)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은 이 기간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工兵)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步兵)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이 준비해 놓은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언어의 통일과 구약 70인 역 탄생

B.C. 336년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Macedonia) 도시국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필립 2세(Philip II, BC 382-336)가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 전쟁 전문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필립 2세는 암살당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였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사람이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세계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6)고 했다.

또 통일된 헬라어로 구약성경 ‘70인 역’(七十人譯, LXX, Septuagint)이 탄생했다. ‘70인 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래서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

이 ‘70인 역’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들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경우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이 ‘70인 역’ 구약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Κοινὴ Ἑλληνική)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하셨으나 여전히 이같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를 조성해가셨다.

1) 말라기의 뜻, 말라기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9.
3) 같은 책, 11.
4) H.야거스마,『신약배경사』(솔로몬, 2004), 19-20.
5) 오현제는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 13대 트라야누스, 14대 하드리아누스, 15대 안토니우스, 16대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6) 김병국,『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남북분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면서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신(新) 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9)과 신(新) 바빌로니아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 이 연이어 부상(浮上)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Neo-Assyrian Empire)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Neo-Babylonian Empire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으나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넘어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BC?-727,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다.”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라고 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는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바뀌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人頭稅)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한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親) 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5)라며 “(친 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라고 했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했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동맹군의 칼이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에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 사람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한 유대 군사가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앗수르 인들을 다메섹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도록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침공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Sargon II, BC 765-705)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Megiddo)는 완전히 무너졌고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세워졌다. 하솔(Hazor)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Shechem)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10)고 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2)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으나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Sennacherib, BC 740-681), 에살핫돈(Esarhaddon, BC ?-66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27) 때에 본격화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Shamash-shum-ukin, BC ?-648)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통치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사르 이스쿤(Sinsharishkun, BC ?-626)과 이 와중에 반란자 아슈르 에텔 일라니(Ashur-etil-ilani, BC ?-627) 사이에 일어난 수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新) 바벨론의 창건자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58-605)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神)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3)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Necho II, BC ?-595)는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했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애굽의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애굽의 느고는 2세는 다시 한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BC 634-562)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 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Nebuzaradan)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한다.13)

(4) 유대 땅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쳤던 무리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한 이스마엘이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했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 역시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 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3. 바벨론 멸망과 유대인 포로의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 제국은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Amel-Marduk, BC 562-560,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였다.1)  바벨론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2)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로 결국에 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Belshazzar, BC ?-539, 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왕위를 넘겼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Akitu)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했다.

(3)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Media, BC 727-549, 성경에는 메대)였다.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Persia, 성경에는 바사)에 고레스(Cyrus II of Persia, BC 601-530)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Kingdom of Lydia,  about BC 1200-546)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곧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3)

국력을 견고히 한 후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는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한 뒤 고국 바벨론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 of Media, BC 584-559?)가 많은 양의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태몽을 꾼다. 마고스(magus, 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그 후 딸 만다네를 보낸 첫해 아스티아게스는 또다시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Harpagus)에게 자신의 딸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4)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사리아나와는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을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정복민이 자신들의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굴복당한 이방 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자신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회유(懷柔)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 

고레스는 이같이 각 나라의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레스의 피정복민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5) 유대 포로의 귀환

하나님은 고레스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말씀대로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국으로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편집자,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Persian Empire, BC 539-323)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 초대 왕 키루스 2세(성경에는 고레스) 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고 새로운 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 BC 550-486)가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Xerxes I, BC 519-465, 성경에는 ‘아하수에로’)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1)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리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Greece)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먼저 1차 침공은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Mount Athos)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때렸으며 수많은 함선이 아토스에 내동댕이쳐졌다. 3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었다.”1)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Athens)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치고 전진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 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으나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 전사했다.3)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였다. 그야말로 대군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은 이렇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2)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고레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스(Cambyses II, BC ?-522)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of Persia, BC ?-424)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1)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5. 알렉산더와 그리스제국

그리스(Greece)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Athens)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Sparta)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들 중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衰落)했다.

 (2)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로 테베에서 마게도니아(Macedonia)로 넘어갔다. 마게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전쟁의 천재라고 하는 필립포스 2세(Philippos Ⅱ or Philip Ⅱ, Philip of Macedon, BC 382-336)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暗殺)당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통치자로 등극한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들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으로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Darius III, BC 380-330, 페르시아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Tyres)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 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때 두로 사람 8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1)고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대제국의 대왕(大王)이 되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니아 사람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 전파자로 기록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2)고 밝혔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1.
2) 김병국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6. 애굽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or Alexander The Great, 356-323)이 이룩한 그리스제국(Greek Empire, BC 332-323)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1) 분열된 그리스 대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Roxana, BC 340-310)에게서 유복자(遺腹子)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성년이 되기 전 록산나와 아들(Alexander IV of Macedon, BC 323-309)을 살해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Ptolemy Ⅰ Soter, BC 367-282),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5-297), 리시마코스(Lysimachus, BC 360-281), 셀류쿠스(Seleucus I Nicator, BC 358-281)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 대왕을 뒤이어 그리스제국의 왕이 된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 382- 301, 알렉산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통에 모든 도시는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했다.

(2) 애굽 프톨레미 왕조 지배하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애굽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는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처럼 가장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프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던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주변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프톨레미 왕조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했으나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해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 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문화권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했다.

비록 애굽의 지배는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가 프톨레미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기까지 약 120년간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구약 ‘70인 역’의 탄생

구약 ‘70인 역’(譯)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다. ‘70인 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 308/9-246)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 역’ 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문화권에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때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LXX Bible: Joshua, Egypt, late 2nd C. 몰랐다. 그러므로 만약 ‘70인 역’ 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해도 못 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 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 프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 65-63)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미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Carthage)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1)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뜨린다는 한니발의 평생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賠償金)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전쟁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전(神殿)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Seleucus IV Philopator, BC 218-175)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극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Epiphanes)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 한 레위 지파도 아닌 야손(Jason, 주전 174-172 제37대 대제사장, 셀류쿠스 지배 시 극악한 대제사장 중 하나)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Menelaus)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과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이때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무차별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 된 이교도들과 유대교를 배교 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안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했다.3)

안티오쿠스 4세는 또 안식일 금지, 할례 금지, 율법서 소지 금지 등 유대인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勅令)을 내렸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과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사람들이었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Zeus, 그리스 최고의 신)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카베우스’(Maccabaeus)라는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 급기야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8. 마카비의 반란(Maccabean Revolt, BC 167-160)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지적한다.1)

(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경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모딘(Modein)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 이방신(異邦神, 그리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Modein) 지역 하스몬 가문(Hasmonean)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던 마타디아(Mattathias, BC ?-166)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러 제단으로 나왔다. 이를 본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험준한 산으로 숨었다.

이후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하고 회당을 재건했다.”3)라고 말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BC 166년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 유다(Judas Maccabeus, BC ?-160)가 뒤를 이었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Maccabee, 망치질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2) 마카비의 승리와 성전정화

마카비(Maccabees)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과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 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아스(Lysias)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Lysias)는 그의 부하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 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고 오히려 노예 상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3)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 드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요 10:22)이라 부른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Eleazar Avaran, BC ?-162)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본국으로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 군대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의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Alcimus, High Priest of Israel for BC 162-159)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지원군과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유다 마카베오스는 결국 이 전투에서 BC 160년 장렬히 전사했다.(*) 글쓴 이 / 조믿음 기자

출처, http://www.bami.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53&item=&no=417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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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 BC 140-37 > 각 이름 아래 연도는 재위 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