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부록

추기경에게 보낸 회답을 통해 본 칼빈의 종교개혁 내용

제네바 시 의회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칼빈

 

PART Ⅱ

종교개혁에 대한 개혁자들 자신의 인식과 이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칼빈의 글 몇 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그 첫 번째 글로서,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문에 실린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에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에 소개할 글은 로마교회의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쓴 편지에 대한 1539년 칼빈의 답변서이다.  

 칼빈이 이 답장을 쓰게 된 이유

부활절 성찬 참여를 거부한 제네바 시민에 대한 교회의 권징(勸懲) 문제로 칼빈과 파렐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에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으로 온건한 에라스무스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市)를 다시 로마 가톨릭 진영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제네바 시민들에게 회유(懷柔)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사돌레토는 ‘오직 자신의 영예와 이익을 위하여 책동하던 자들에게 유혹을 받은’ 시민들은 이제 ‘영원한 구원’을 생각하고 다시 로마 가톨릭 ‘어머니 교회’ 품으로 돌아오라고 훈계했다. 이러한 그의 편지는 제네바 시(市)에 잔존 해 있던 로마 가톨릭 당파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칼빈을 쫓아낸 제네바 시(市)에 이제는 추기경의 회유와 비판을 반박할 만한 실력 있는 교회 지도자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제네바 시(市) 당국은 염치불구하고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에게 사돌레토의 편지를 반박하는 글을 써 달라고 간청했다.

칼빈은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를 전해 받은 지 엿새 만에 회답을 써서 보냈다. 그러자 제네바 시(市) 당국은 칼빈의 답변서를 추기경의 편지와 함께 묶어 출판했다. 칼빈의 답변은 후에 루터조차도 감탄하면서 ‘상대방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답변’이라고 말했다. 이 답변서에서 칼빈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로 발휘하여 성경 지식, 정중한 언어, 논증, 깊은 종교적 감정 등에서 학식으로 유명한 사돌레토 추기경에 필적할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칼빈의 답변 내용

칼빈의 편지는 대체로 사돌레토 추기경이 보낸 편지의 구조를 따라 답변하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추기경은 우선 자신의 편지 서문에서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영생의 가치’를 아주 중요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 올바른 예배는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갔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방법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규례에 따르는 일이고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영생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불경건한 교리의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돌레토 편지의 핵심적인 논지였다.

1. 개혁자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반박

칼빈은 답변서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동기가 야심과 탐욕이라는 사돌레토의 중상모략을 반박했다. 두 차례나 언급할 정도로 칼빈은 이런 비난을 심각하게 여기고 차근차근 반박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사실상 제네바 시민들을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칼빈은 만일 제네바의 개혁자들이 출세와 부귀영화를 추구하였다면 오히려 로마 가톨릭교회에 남아 있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칼빈 자신이나 파렐 등 모두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 종교개혁에 가담함으로써 오히려 신분에서나 재정적으로나 큰 희생을 감수하였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증언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개혁자들의 편에 선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다고 변증할 수 있노라고 힘있게 말했다. “종교개혁은 개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혹은 명예를 위하여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자신을 비롯한 제네바 시의 개혁자들이 취한 개혁의 조치들이 오히려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잘못된 재정적 특권을 바로 잡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의 동기를 탐욕과 야심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시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말씀 사역자들의 올바른 재정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목사들은 적절한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즉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혹은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 그 외 교회 수입은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 옳다.
  • 교회는 교회 재정을 관리할 직분(집사)이 반드시 필요하다.

2. 종교개혁의 성경적 교리 비난을 반박함

칼빈의 답변서의 본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된 교리에 대한 사돌레토의 잘못된 비난을 반박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지도 아래 제네바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수한 교회를 지향했고 그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 제도를 벗어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논지에서 드러나는 칼빈의 주장의 요점이다.

(1)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칼빈은 영생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높이 강조하는 사돌레토의 태도를 비판했다.

“사람이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그의 삶의 기초가 되지 못하는 그런 신학은 결코 좋은 신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지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했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면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사람들이 마음에 더 잘 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그 일을 촉진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열망을 우리의 구원과 불가분리하게 연결시켜두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이 우리 자신의 유익과 복락을 위하는 모든 생각을 능가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단지 그 자신의 영혼 구원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하여 씨름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의 구원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인간의 구원과 인생의 참된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따로 떼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칼빈은 잘 지적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는 인식입니다.”  

편지에서 칼빈은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와 같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여러 교리에 대해서도 아주 뛰어난 표현으로 잘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이 부분을 답변의 백미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일찍부터 ‘하나님 영광의 신학’을 우리의 구원보다 더 높은 가치로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2) 올바른 예배의 기초인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교회

사돌레토 추기경은 가장 중요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예배 곧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전(禮典)을 따라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하여 칼빈은 가톨릭교회의 예전(禮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반박했다.

칼빈은 개혁자들이 가르치는 경건훈련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하셨던 그 예배가 유일하게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합당한 예배는 당연히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배라는 것이다. “성경을 잣대로 평가할 때 로마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의 교회 중에 정직하게 말한다면 과연 어느 쪽이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그러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회관(敎會觀)을 지적했다. 사돌레토가 그렇게 강조하여 주장하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토대가 빠져 있다고 칼빈은 날카롭게 지적했다.

“종교개혁 교회는 항상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cum Verbo) 다스리신다고 믿고 고백하는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거하신다고 주장은 하면서도 그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성경을 무시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칼빈은 좌로 또는 우로 치우치는 당대의 거짓 교회들의 공통된 특징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당시에 극우에 해당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극좌에 해당하는 재세례파(Anabaptists)의 공동체들은 놀랍게도 ‘성령을 강조하면서 성경은 무시하는’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분파(sect)로부터 공격을 당합니다. 사실 교황과 재세례파 사이에 어떤 외적인 일치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분파가 우리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주된 무기는 동일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마귀가 얼마나 능숙하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 자신의 본질을 가리면서 변장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게 됩니다. 성령께 대한 정도를 넘은 호소를 통하여 두 분파는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려 매장시켜버리는 경향에 빠져들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거짓말들을 내세울 공간을 마련합니다.”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답변서를 쓰고 있을 당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한 프랑스인들의 교회를 담당하여 목회하는 과정에서 재세례파들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재세례파의 관점이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재세례파의 관점이 성경보다도 성령에 더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일했다.

“이처럼 양극단은 서로 통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선언서’(the speaking of the church)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재세례파는 ‘그 자신 마음의 움직임’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분파는 꼭 같이 성령께서 교회에 은혜의 수단으로 베풀어 주신 그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유명한 설교자인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의 충고를 인용하여 그런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성령의 구실 하에 복음의 단순한 교리들로부터 호도하려는 자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칼빈은 과연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제네바 시민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밝히 증거 하려 했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였던 초대교회를 주목하는 까닭은 초대교회가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비추어 주는 거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당대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리, 권징, 성례, 예전들이라는 네 가지 지표들 모두에서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에게 크게 이탈했다. 반대로 종교개혁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려는 교회’라는 사실을 칼빈은 독자들에게 증거 했다.

(3)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하여

사돌레토는 개혁자들이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교리로 반(反) 율법주의를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제네바 신앙교육서를 예로 들며 “그 책은 성도들이 자신을 살펴보아 자신의 죄악 됨과 무기력을 깨닫고 겸손할 것을 가르치며, 오직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유일한 안식처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이신칭의 교리를 선포하는 개혁자들은 결코 성도들의 방종(放縱)을 조장하는 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또 성경의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인간 자신의 의(義)가 아니라 죄인의 공로(功勞)와 무관하게 그의 불의를 책망하지 않고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 ‘이신칭의 교리는 곧 율법폐기론’이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피상적인 비난을 강하게 반박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선행을 원하시는’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 선행이 곧 칭의(稱義)에 기여하지는 않으나 구원받은 의인(義人)의 삶 속에는 반드시 선행(善行)이 있어야 한다.
  • 정결과 거룩에 대한 열심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
  • 개혁자들은 칭의에서 성화로 나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예정교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한다.
  • 구원의 선포인 칭의(稱義)의 목적은 거룩이다.
  • 칭의(稱義)를 받기 위한 인간의 공로(功勞)로 사랑을 내세우는 사돌레토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4) 로마 가톨릭교회의 참회와 고해성사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교회가 은혜의 복음 곧 성경이 가르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버렸기 때문에 ‘참회와 보속(補贖)의 행위를 통한 사죄’라는 잘못된 교리에 빠졌다고 칼빈은 지적했다. ‘마음으로 참회하고’(contritio cordis), ‘입으로 시인하며’(confessio oris), ‘보속(補贖)의 행위로 만족시키는’(satisfactio operis) 일견 아주 잘 구성된 로마 가톨릭교회 방식 속죄의 행위는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남김없이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유일성을 훼손하는 신성모독의 행위로 전락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고해성사(告解聖事)로 발전한 참회(懺悔)는 초대교회에서도 시행되었던 유서 깊은 제도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해 칼빈은 초대교회의 참회 예식은 회개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지 ‘속죄의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바르게 지적했다. 그리고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의 주도하에 모인 제4차 라테란 공의회(Councils of Lateran, 1215)에서 결정한 연례적인 고해성사의 의무와 관련하여 참된 회개를 위한 그 제도가 무수한 재앙들을 초래하는 ‘끔찍한 고문’으로 변질이 된 중세 말 로마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죄 사함 곧 이신칭의의 가르침으로 인한 마음의 평화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신부였던 루터는 고해성사에 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수도원 시절 이래로 고해성사를 부지런히 활용했고 또 사제로서 고해성사를 통한 목회적 돌봄을 신실하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타락과 함께 고해성사는 성도들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교회의 강제수단으로 전락했고 그 제도를 선용하는 모습은 거의 찾기 힘든 지경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나중에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비롯한 일부 영국의 청교도들 중에는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유익과 선용을 지지하는 의견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5) 성찬에 대하여

성찬의 의미에 대한 해석문제는 종교개혁 당시 ‘쉽볼렛’(삿 12:4-6)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교회를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성찬에 대해 사돌레토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corporeal presence)를 부인한다고 비판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는 요한복음 6장 말씀을 극히 문자적으로 이해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만찬 교리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해괴한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교회가 베푸는 기적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고방식이 성찬 곧 미사의 기적을 고수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칼빈은 잘못된 이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찬에 대한 해석을 반박하면서 주의 성찬과 밀접하게 연결된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르다누스(Dardanus)에게 보내는 편지를 반박의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편재(遍在)와 인성(人性)의 제한을 설명하는 것으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인성(人性)이 아닌 신성(神性)으로 친히 임재하시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찬에 임재방식은 화체(化體)를 통한 물질적 임재도 아니고 편재를 통한 장소적 임재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성찬에 임재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근거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영(靈)이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참되게 임재 하셔서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신다고 주장했다.

칼빈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은 오히려 성찬을 통한 주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다는 것이다. 왜냐면 거기에는 올바른 성경적 구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러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의 물질적 변화라는 화체(化體) 사상은 오히려 성찬의 요소들을 우상숭배 하듯이 받드는 비성경적인 관습으로 타락해버렸다고 지적했다.

(6) 성인들의 중보기도와 연옥에 대하여

칼빈은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다가 돌아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무수한 미신들은 일체 배격했다. 왜냐면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서 그리스도의 중보(仲保)의 직무를 흐려 놓은 미신적인 제도들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무수한 성인(聖人) 숭배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상 잊어버렸다.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나 다른 어떤 성인(聖人)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이런 그릇된 관습을 칼빈은 단호하게 우상숭배라고 배척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초대교회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적인 교리이다.  

성인(聖人)들의 중보(仲保) 기도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주장이 바로 연옥(煉獄, Limbo or purgatorium) 사상이다. 칼빈은 이 연옥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래로 교회 안에 일어난 무수한 해악들을 지적했다. 미신과 탐욕과 사기와 협잡이 연옥사상과 연결되어 참된 신앙에 큰 피해 입히고 예배가 크게 파괴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현실을 고발했다. 무엇보다도 연옥사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해악은 사랑을 실천하는 합당한 성도의 직무들은 완전히 무시되고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헛된 일 곧 죽은 자를 돕는 일에 경쟁적으로 몰두하는 왜곡된 신앙 현실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아무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초대교회의 관습을 들어 옹호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칼빈은 “초대교회에 뿌려진 미신의 씨앗들이 최근에 불신앙의 괴물들로 자라났다.”고 비평하면서 내세(來世)와 천국에 대한 개혁자들의 교리가 성경과 교부(敎父)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천명했다.

3. 종교개혁은 교회의 분열이라는 비판을 반박함

(1) 종교개혁의 핵심은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으려는 것보다도 성경을 벗어난 교리적 탈선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사톨레토는 “교회의 관습이 악화되었다는 구실로 교회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라고 개혁자들을 분파주의자들로 몰아붙였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의 비판에 대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핵심은 교회의 타락한 관습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꺼져버린 복음의 빛을 다시 밝히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당대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은 그 교회의 갖가지 악습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그런 악습들도 큰 문제이지만 교회개혁의 명분은 복음의 빛과 관련된 문제 즉 참된 성경적 교리를 다시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또 사돌레토는 ‘개혁자들의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현재(칼빈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응수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감독자들은 교인들을 잡아먹는 이리와 늑대로 변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 받은 합당한 직분 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집단이 되었으며, 소위 ‘사도적 계승’(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 이론에 따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교황의 정통성은 다만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킬 때만 인정할 수 있다고 논박했다.

“사도성(使徒性, Apostolicity)은 무엇보다도 사도적 교훈(使徒的 敎訓, Apostolic Teaching)에 따라 평가할 일이지 영적인 자동주의(自動主義)를 조장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 Apostolic Succession)을 내세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은 그 참담한 현실이 보여주듯 허망한 일일 뿐입니다.”

(2) 로마 가톨릭의 신학은 한가로운 신학이다.

종교개혁 당시 풍자 만화 (교황과 추기경들)

개혁교회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칼빈은 사돌레토가 참으로 ‘한가로운 신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회의 영적 현실은 사탄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무기인 말씀과 성령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에 빠져 지적인 사고(思考) 노름이나 하는 로마 가톨릭에 의한 중세의 영적 현실을 비판했다.

칼빈의 이 같은 비판은 현대 교회들도 소위 ‘칼빈주의, 개혁주의’ 운운하면서 성도들의 영적 전쟁의 현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어느새 정형화(定型化)된 ‘개혁신학’을 맹종하고 있으면서 삶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한가한 신학, 한가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구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칼빈의 답변의 결론은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와 평행을 이룬다. 즉 그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인과 개신교 교회 교인이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사돌레토는 그의 편지에서 로마 가톨릭교회 교인은 그리스도께서 팔을 벌려 천국으로 반갑게 맞아주시겠으나 개신교 교회 교인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결론을 지었다.

사돌레토의 이런 표현에 대해 칼빈은 자신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나아와 자신의 인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감동적인 참회를 한다고 반박했다. “주님, 이제 이 가련한 저에게 변명 대신 주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 외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간 끔찍한 잘못을 저에게 돌리지 마시고 주님의  놀라운 선하심으로 그런 타락에서 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에 관한 사돌레토의 비유를 역으로 사용하여 칼빈은 이신칭의 교리가 주는 참된 신앙의 확신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3) 주님께 탄원하는 기도와 개인적 고백에 대하여

사돌레토는 칼빈과 제네바의 개혁자들을 가리켜 이단(異端)들이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께 올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 내용으로 자신의 소명과 사역을 변호했다.

“주님께서 우리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의 수종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우리가 진력하는 종교개혁의 사역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 가톨릭교회의 유래가 없는 탈선과 타락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진리를 옹호하는 마땅한 일이며,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진리의 기초 위에서 교회의 일치와 하나 됨을 위해 진력하였나이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이 왜 어떻게 개혁자들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설명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참된 구원과 평강을 개혁자들이 제공한 것과 개혁자들의 진정성과 진리의 증거들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회답을 읽는 독자들에게 로마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의 상이한 두 가지 신앙고백을 비교 대조하기를 촉구했다.

즉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의 ‘가늘고 위태로운 줄’을 지적하며 최후 심판의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사들의 오늘날(칼빈 당시)의 모습을 평가해 보도록 권고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일차적으로 제네바의 시민들이 그리고 나아가 칼빈의 회답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된 성경적 신앙에 대한 확신을 얻기를 기대했다.

이 유명한 칼빈의 답변서는 개혁자들이 탐심의 동기로 개혁을 일으켰다는 비난에 대해 다시 반박하고 또 개혁자들이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비난에 대해 재차 반박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마도 칼빈은 그의 생각에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독자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개혁주의’는 개혁해야 할 대상이 분명할 때 그 참된 모습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개혁주의는 성경의 척도로서 끊임없이 현실 교회의 타락과 왜곡을 주의 깊게 살피는 본래의 모습보다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권위와 척도’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우리도 ‘한가로운 신학과 목회’를 하느라고 참된 영적인 과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 칼빈을 통해 개혁의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참된 개혁의 정신을 일깨워주시기를 필자로서는 무엇보다도 소원한다.(*) 글쓴 이 / 김진흥 교수(브니엘신학교 역사신학)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문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 고려신학대학원(M.Div.) 화란 개혁교회 캄펜신학교(자유파) 신학박사  출처 / 말씀/선교/문화(Ctm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