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5)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주님의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5)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주님의 위로

30601
제 19 주일(문 52)

요절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문 52 :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 내가 어떠한 슬픔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전에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 의 심판대 앞에서 내게 임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 분께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심판자이심에 대하여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기다 립니다.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을 영원한 멸망으 로 징벌하실 것이며,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52번 문답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마지막 사역에 대해 공부한다. 주제는 재림하실 주께서 행사하시는 최후 심판이다.

1. 재림 신앙의 중요성

이 주제는 사실상 예수께서 수행하시는 사역의 마지막 사역으로 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이루신 모든 사역을 완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재림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주님만의 고유한 사역이기에 성도들에게 큰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재림은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구속 사역 즉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통치하시는 모든 사역을 완성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재림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으로 이를 세밀하게 살펴봄으로 구속사역의 완성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들은 재림이 막연하게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인식하여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구속 사역임을 알고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임을 명심해야한다.

재림을 믿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과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구속사역의 최종 단계에서 일어날 주님의 구원사역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은 구원을 십자가로 시작하시는 구속주시며 또한 이를 최종적으로 점검하셔서 완성하시는 심판주이시다.

이 엄위로우신 주님의 심판사역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된다. 이는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자가 예수와 연합하여 죽고 다시 살아난 자들이며,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하심으로 최종적으로 구원을 완수하기기에 예수와 연합한 자들은 이때를 고대하며, 이 땅에서 믿음을 지켜 살아갈 때 담대한 용기를 가지며 참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2. 최후 심판에 대한 이해

(1) 심판의 성격
일반적으로 심판하면 재판이 열리는 장소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할 때 재판관이 이 땅을 재판소로 삼고 다시 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의 재림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의 말씀과 같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심판을 수행하러 오시는 것이다. 이렇게 오시는 최종 심판자의 재림을 어떻게 사람들이 막을 수가 있겠는가!

(2) 심판에 대한 이해

재림 때 시행하실 주님의 심판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이해가 있다.

첫 번째 이해는 무서운 심판으로 인식하여 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행동한다. 이런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재림하셔서 심판하는 주님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실상 심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일부러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두 번째 이해는 이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하면서 빨리 심판 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성도들의 신앙이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건전한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이 땅에서 부름을 받아 감당해야할 분명한 사명이 있기에 이를 힘들더라도 신실하게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잊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견해 모두가 동일하게 자기중심적인 이해에서 출발한 재림 하실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 하겠다. 이 경우 모두가 주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심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인식이라 할 것이다.

교회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는 핍박과 고통의 시대에는 현실도피성적인 신앙 형태가 유행하여 주께서 빨리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을 가르치고 성도 또한 그러한 신앙을 갖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평안할 시대에는 재림에 대한 신앙이 약회되고 또한 가르침이 강조되지 않고 또한 성도들 역시 현실 안주형의 신앙 형태가 유행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 파악된다.

그러나 사실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 교훈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에 따라 확실하게 시행될 것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주께서는 이러한 차원에서 강도같이 홀연히 임하실 것이기에 철저하게 준비할 것을 말씀하셨다고 믿는다.(막 13:36; 마 25:13)

3.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서의 재림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재림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최종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즉 재림이 없으면 초림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 재림에 대한 인식은 신중하게 다루어져야지 대충하거나 혹은 회피할 주제가 될 수 없다.

52문의 답변에서,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징벌하실 것이며,”라고 했는데 이 얼마나 신나고 통쾌한 고백인가!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구속 사역을 방해한 악의 세력들, 또 성도가 바른 신앙을 갖고 살아가려는 것을 방해한 악한 세력들을 영원히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환희에 찬 고백일 것인가!

이렇게 주님의 재림은 예수 안에서 믿음을 지킨 신실한 성도들에게 주어질 큰 위로의 사건이기에 신실한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오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마련이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셨고 사도는 감격 속에서 재림 하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기록하였다.

4. 심판하실 두 부류
사도신경에서 “산 자(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할 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자들일까? 흔히들 여기서 ‘산 자’ 즉 살아있는 자들은 예수를 믿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이며, ‘죽은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재림하실 당시 살아있는 자들이 “산 자(들)”이고, 재림 당시 죽어 무덤이 묻힌 자들이 ”죽은 자(들) “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재림하실 당시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심판하여 영원한 영생으로 선언하시고, 이미 죽은 사람들을 향하여서 놀랍게도 그 무덤에서, 화장하여 재가 된 상황 하에서, 그리고 심지어 오래 전에 죽어 흙이 된 상태에서 신비스럽게도 그들을 일으키셔서 심판하신다. 이러한 설명은 바로 심판 주되신 예수께서는 사도에게 이 점에 관하여 게시하심을 이해할 때 깨닫게 된다.

사도 요한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13)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바다에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 주어 그들이 행한 대로 주님으로부터 최후의 심판받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때 믿는 자들은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지만,(마 25:34)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 불 못에 처해지는 형벌이 선언된다.(마 25:41)

한편 예수를 믿고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성도는 이미 구원받아 첫 번 부활로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게 되지만,(계 20:5,6) 재림 시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 못에 던지도록 선언하시고, 살아생전에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그가 살아생전에 저지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당연히 이 때 자살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기준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이들 역시 심판받게 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재림하신 주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역시 다시 살아나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5. 재림이 주는 위로

52 질문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 어떤 위로를 주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예수의 재림이 성도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이며 그 위로는 어떤 차원에서의 위로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주제는 ‘위로’이다. 즉 삼위 하나님의 구속역사 자체가 성도에겐 위로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차원에서의 위로를 예수님의 재림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답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는 성도가 이 땅 위에서 겪는 온갖 핍박 속에서 저주스러운 고통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 모든 죄의 형벌을 모두 자신이 친히 담당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께서 친히 심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셨다는 데서 크나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즉 이 구속의 진리를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악의 세력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다시금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성도들을 괴롭힌 그 악한 세력들을 심판하시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는 이 심판자 예수님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성도들이 당한 모든 슬픔과 고통 그리고 저주스러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 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자랑스럽게 머리를 곧게 세우고 하늘을 바라보고 오실 주님을 대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재림하신 주께서는 구원의 최종 완성자로서 심판하시고 또한 구원을 완료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께서는 알곡은 모으시고 쭉정이는 모아 불에 때워 버리시는 심판주로서 강력한 사역을 수행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재림주로서의 예수께서 완성하실 최후의 상황을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라고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재림하셔서 쭉정이는 버려 불에 태워버리시고 알곡을 모아(마 3:12; 눅 3:17), 아버지 하나님께 받치시는 사역을 수행하심으로 성도의 구원을 이루신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복음인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경륜을 믿는 성도들이기에 이 영광스러운 반열에 포함된다는 재림의 복음은 정말로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재림은 불신자에게는 절망적 공포의 소식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참된 위로이며 격려일 뿐 아니라, 영원한 소망이요 참된 기쁨이다.

심판주의 재림은 성도의 구원의 최종 순간이다. 어린양 되신 주께서는 바로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하셔 십자가의 희생제물 되셨고 이렇게 이루신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배설하여 모든 성도들을 초대하신다.(계 19:9)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어린 양되신 주께서 무서운 진노로 심판하신다.

이 광경을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5-17)

진정 재림하신 주께서는 성도들을 그 어린양 혼인 잔치에 모두 초대하셔서 구원의 완성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다. 재림하셔서 무서운 심판을 행사하시는 상황 속에서 어린 양되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이상의 위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성도들은 이 복된 자리에 있음을 확신하고 재림의 교리를 확고하게 믿는 바른 신앙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

6. 재림의 때와 징조

초대교회 때부터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마라나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다. 그런데 이러한 소원이 지나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임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고 여기에 현혹되어 엄청난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고 지금도 그런 왜곡 현상이 더욱 자주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재림에 관한 말씀들은 구체적으로 날자와 장소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직 종말의 현상과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고 권면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 말씀들에서 성도들은 성경은 단지 말세의 징조들을 보여 줄 뿐, 재림의 때 혹은 장소를 밝히고 있지 않았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 말씀들을 통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알고 대비하도록 하고 있는 데 그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라고 강조했다.

(1) 재림의 때

그러면 예수께서는 언제 재림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먼저 생각할 점이 있다. 즉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고 강력하게 권면했다. 또한 그는 “만물이 처음 창조 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있다!”(벧후 3:4)고 하면서 재림에 대하여 조롱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라고 고의적 불신앙을 지적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현대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절대 믿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기술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 나머지 재림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씀하고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2,13) 그러나 그 때는 계시하지 않고 있다

(2) 재림의 징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전조는 어떤 상황으로 나타날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져야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인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적지 않은 많은 정보들을 재공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고,
2)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교회 내에 들어와 채워지고,
3) 복음을 믿던 자들과 교회들이 배교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4) 불법의 사람들이 나타나 혼란을 가중시키고,
5) 세상 곳곳에 지진과 전쟁등과 같은 것이 발생하며 대 환란이 일어 날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재림의 현상에 집착하여 인간적인 열심히 사업을 구상하고 또한 그 목표를 세워 완수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단축시키려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 있다. 일례로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예수를 믿게 하면, 이를 위하여 세상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면,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파송해야 한다고 주장하던지, 모든 유대인이 예수를 믿게 되면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유대인 선교에 주력해야 하고, 또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다시금 복음이 되돌아가 그곳에 초대교회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당이 세워지면 종말이 올 것이므로 그곳에 복음 전할 자들을 파송해야 한다는 식이다.

또한 처처에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 그리고 중동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현대의 각종 문화적인 현상들을 재림의 구체적인 증상으로 단언하여 확대 해석하여 그 일어나는 현상 하나 하나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재림의 증거들과 대입 시켜 임박한 재림을 확신에 차 가르치는 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지나친 열심으로 주님의 재림이 단축되고 또 어느 때 어느 장소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재림이 이루어지게 될 것은 만무(萬無)하다. 정말로 이런 주장들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이로서 성경이 말씀한 바대로 건전하게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게 가르치는 교회와 성도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까지 호도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사실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성도들은 성경적인 영적 분별력을 갖고 이런 사이비적 재림 교훈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예의 주시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준비하는 신실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7. 경성하여 재림을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

주께서는 앞에서 언급한 각종 현상과 징조들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재림의 정확한 때에 관해서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경고하시며 강력하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a) 경고하셨다.

과연 “깨어있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의 문제는 가장 성경적인 재림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성부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에 속한다.(마 24:36) 요리문답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원수를 나의 원수로 알고 재림의 교훈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자들을 철저하게 규명하여 그러한 교훈이 옳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가르쳐서 잘못된 교훈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는 말씀에 따라 성도는 다음과 같이 깨어 있어야 한다.

1) 스스로 조심하여 세속에 빠져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2)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며,
3) 영적으로 세상에 취하여 살지 말고 경성하여 주께서 완성하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한다.

결 론

오늘날 온 세상이 말세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말세와 재림이 성도들이 두려워하고 회피해야 할 사안인가? 재림에 관한 긴장감과 경각심을 가질 것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비 성경적인 개념과 의식을 가지고 인간적인 열심히 주님의 재림을 단축해 보려는 의도는 배제되어야 한다. 분명한 점은 주께서 재림하심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 차원에서 볼 때 주님의 재림은 분명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가 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께서는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행위, 난관에 봉착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돌봐주는 행위, 소외되고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는 행위에 대하여 양과 염소를 갈라 배치하듯이 선행자들은 오른편에, 그렇지 못한 자들을 왼편에 배치하실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인식하고 이 땅에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준비하는 자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성도들은 히브리서 저자가 간곡하게 권면하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이것이 재림하실 주님을 대망하는 성도의 자세로 성도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잘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참되고 복된 위로인 것이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