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아더 핑크 하나님의 주권이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다 주패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PART Ⅰ  

‘하나님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은 예전에 널리 이해되었던 용어이다. 또 기독교 저작(著作)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문구이며 설교에서 자주 다루었던 주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은 많은 이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그리스도인에게 힘과 안정을 주었던 진리(眞理)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이 마치 외국어처럼 되어 버렸다. 어느 교회에서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라고 하면 마치 어느 고대어를 듣는 듯하다. 이것은 비극이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역사를 푸는 열쇠이자 하나님의 뜻의 예보자이며, 성경의 기초이자 기독교 신학의 토대이다. 그런대 이런 교리(敎理)를 이처럼 소홀하게 여기고 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하다니 이는 참으로 비극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偉大) 하심과 하나님의 왕권(王權)과 하나님의 신성(神性)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은 지존자(至尊者)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라는 선언이다.

또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은 전능(全能)하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주인이라는 선포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하고, 그분의 목적을 막지 못하며, 그분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시 115:3 참조)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이 “모든 나라의 주재(主宰, 통치자, governor)이시며(시 22:28),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나라를 세우고 제국을 무너뜨리시며, 왕조의 길을 정하신다는 공포(公布)이다.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이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다!’”(딤전 6:15)라는 외침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짜 모습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현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가장 널리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초상은 진리를 흉내 낸 어설픈 모조품이자 진품을 우롱하는 위작(僞作)이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은 지성인의 존경도 못 받는 무기력하고 허약하며 가냘픈 존재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유약한 감상의 피조물처럼 경외심을 자아내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다.1)

성부 하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며, 성자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할 목적으로 죽으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 하신다.2) 이것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세대의 절대 다수가 죄 가운데 죽어 가고 소망 없는 영원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실망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불만이 가득하시며, 성령 하나님은 패배감에 젖어 계신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나는 문제를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최선을 다하고 계시지만 대다수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이 시대에 만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결국 창조자는 무기력하고 도리어 피조물이 전능하다는 주장이다. 또 많은 사람이 실패에 대해 마귀를 탓한다. 그러나 마귀를 탓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고 있다면 마귀가 전능자이고 하나님은 더는 지존(至尊) 자가 아닌 것이다.

또 창조자의 본래 계획이 죄(罪) 때문에 어긋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폐위(廢位)하는 짓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기습 당하셨는데 이제 뜻하지 않은 불행을 되돌리려 하신다.”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은 지존 자를 욕되게 하며 그분을 실수하는 유한(有限) 한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요 자기 창조자를 이길 힘을 가진 자기 운명의 조성자(造成者, author)라는 주장은 하나님에게서 전능하심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자가 세운 경계를 허물었고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죄와 고통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방관자이다.”라는 현대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소리다. 특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라는 말씀을 반박한다.

이제까지의 말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부정(否定)하는 것은 곧 곧바로 무신론(無神論)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부정(否定)에 대한 논리적 결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絶對的)이고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며 무한(無限)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권자(主權者)라는 말은 우주를 자기 뜻대로 다스릴 그분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리는 진흙으로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한 형상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권리이다. 토기장이는 똑같은 진음덩이로 귀히 쓸 그릇도 만드시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드신다.(롬 9:21 참조)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본성 외에 어느 규범이나 법아래 있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해명할 책임이 있으며, 자기 일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의무가 없다.  

1.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능력을 행하신다.

주권(主權)은 하나님 전체의 특징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성품을 주권적으로 드러내시고 주권적으로 능력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사용하신다. 이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곳곳에서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의 능력은 그친 듯이 보이다가도 갑자기 더없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했으나 바로가 허락하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셨고, 그분의 백성은 해방되었으며, 이들을 잔혹하게 부렸던 애굽 군대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말렉 족속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실 때처럼 이번에도 능력을 행하셨는가? 아말렉 족속이 즉시 패하고 무너졌는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6)고 하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의 능력이 특별하게 나타났다.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의 진로를 막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스라엘은 전혀 싸우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분의 팔을 펴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셨다. 그러나 이 같은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무너진 성은 여리고 하나뿐이었다. 다른 성은 모두 싸워서 점령해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 하신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예는 수없이 많다. 다음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능력을 행하심으로써 다윗을 골리앗에게서 구하셨고,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상처 하나 없이 사자 굴에서 구해내셨으며, 세 명의 히브리 소년이 격렬한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불에 그슬리지도 않은 채 온전히 걸어 나오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능력으로 개입하여 자기 백성을 구해내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6,37) 하지만 왜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구해주지 않으셨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이들과 달리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해주시고 어떤 사람들은 구해주시지 않으셨는가? 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그냥 두시고 바울은 감옥에서 구해주셨는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그 시대의 모든 사람보다 오래 살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아무도 갖지 못한 육체의 힘을 삼손에게 주셨는가? 성경은 이렇게도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8) 그러나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모두에게 똑같이 주시지 않는다. 왜 똑같이 주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몰간(J.P. Morgan, 1837-1913, 미국 자본가며 은행가),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엄청난 부를 주셨는가? 이 모든 물음의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주권적이시며 자기 뜻대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비(慈悲)를 베푸신다.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자비는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자비는 하나님이 비참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해주실 때 드러나는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서는 비참해야 마땅한 자들만 비참하다. 그런데 비참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다. 인생의 모든 비참은 죄의 결과이므로 비참한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자비가 아니라 형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자비를 받아야 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라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게 좋다고 여기실 때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 이 진리를 설명해 주는 주목할 만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두 사람이 매우 비슷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전혀 다르다.  

첫 번째 경우 모세는 단 한 번의 불순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 기도를 들어주셨는가?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중략) 하셨느니라.”(신 3:26) 

두 번째 경우를 보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하라 하셨더라.”(왕하 20:1-6)

두 사람 다 사형선고를 받았고 두 사람 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께서 (중략)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결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요단강 동편에서 죽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의 경우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라고 하셨으며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 이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는 로마서 9:15 말씀을 설명해 주는 좋은 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이 사실은 여호와께서 육신이 되시어 인간들 속에 거하시는 중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유대 명절에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주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이르셨다. 그때 그곳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도 있었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 5:6-9) 왜  주님은 모든 병자 중에서 이 병자를 선택하셨는가? 성경은 그가 “주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문에는 이 사람이 특별한 호의를 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주님이 주권적으로 자비를 베푸신 경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모인 모든 병자를 고칠 수 있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병자를 고치시지 않았다. 주님은 특별히 이 병자를 비참한 상태에서 구해주셨을 뿐 나머지 병자들은 그대로였다. 그 까닭은 주님만 아신다. 이것도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로마서 9:15 말씀을 설명해 주는 좋은 예이다.

3. 하나님은 권적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이 말은 우리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자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두 다 사랑하시지는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모두 다 사랑하신다면 마귀도 사랑하셔야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마귀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마귀를 사랑하시지 않는 까닭은 마귀에게는 사랑할 게 전혀 없고 그분의 마음을 끄는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끌 만한 게 전혀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엡 2:3 참조) 이처럼 어느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끌만한 게 전혀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쨌든 우리 가운데 얼마를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까닭은 순전히 그분의 기쁜 뜻에 있다.4)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주권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범(規範)에 따라 사랑하시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규범에 따라 사랑하신다면 그분은 어떤 규범 된 사랑의 법(法) 아래 계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규범 된 사랑의 법(法) 아래 계신다면 그분은 주권자가 아니라 법(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점에서 대개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죠?” 이 질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한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들이 아무 선(善)이나 악(惡)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유는 에서와 야곱이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사랑하신다.

이 사실은 다음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選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사랑 안에서’ 성부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자녀로 입양(入養)을 예정(豫定)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었을 따라 그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는가? 그들에게서 발견하신 특별한 무엇을 따라 예정하셨는가? 아니다. 그분이 아시는 이들의 미래 모습을 따라 예정하졌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따라 그들을 예정하셨는지 주의 깊게 보라.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동정의 사랑이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안다.5)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구분이며 순전히 창작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러한 가상적인 동정의 사랑을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라 하는데(마 18:33 참조), “그(하나님)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눅 6:35)

4.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恩惠)를 베푸신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더 분명히 말하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자에게 베푸는 호의(好意)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의(公義, justice)와 정반대이다. 공의는 공정한 법의 집행을 요구한다. 공의는 각 사람이 더도 덜도 아닌 법이 정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공의는 호의를 베풀지 않으며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는다. 공의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자비를 모른다.

그러나 공의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된 후에는 은혜가 온다. 은혜를 베풀기 위해 공의를 희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은혜도 또한 의(義)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롬 5:21 참조,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표준새번역) 은혜가 ‘왕 노릇’ 한다면 은혜는 주권적이다. 은혜란 하나님에게 공로(功勞) 없이 받는 과분한 호의(好意)이다.6)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은혜를 마치 자기 권리인양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은혜란 노력 없이 받는 것이며 자격 없이 받는 과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은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은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은혜로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롬 5:15 참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따라서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미치는 범위 내에 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따라서 그 누구도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취하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 사실은 성경의 거의 모든 갈피마다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을 삼으셨다. 장자 이스마엘은 거의 아무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반대로 부모가 늙어서 낳은 이삭은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 마음이 넓고 용서를 아는 아들 에서는 눈물로 축복을 구했으나 받지 못했다.(히 12:7 참조) 반대로 버러지 같은 야곱은 유산을 받았고 귀히 쓸 그릇으로 빚어졌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으나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세리들과 창기들은 주님의 사랑에 끌리게 하셨다. 구주께서 태어나실 때 하나님은 주권적 은혜를 놀랍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우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모든 인간에게 다 알리지는 않으셨다. 대신 베들레헴 근교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에게만 하늘의 별로 알리셨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전체 분위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언적 신호이자 표시였다. 지금도 그리스도가 모두에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에 천사를 보내 아들의 탄생을 알리는 쪽이 훨씬 쉬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에게는 온 인류가 그 ‘별’을 주목하게 하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 하지 않으셨다. 왜 그리 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주권자요 자기 뜻대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주의 탄생을 특별히 알린 두 부류의 사람들을 주목하라. 한쪽은 무식한 목자들이었고 다른 쪽은 먼 나라의 이방인들이었다. 양쪽 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더없이 의아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탄생했음을 알리려고 산해드린공회에 나타난 천사는 없었다. 교만과 독선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에게는 아무 ‘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알아내려고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 탄생의 신비를 이들에게 알리시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무지한 목자들이 이처럼 특별하고 영광된 일에 선택되었다. 그러나 학자들과 뛰어난 자들은 제외되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그분이 태어난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 타국의 박사들에게 알리셨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시대에 인류를 어떻게 다루실지 보여주는 놀라운 예언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며 자신이 원하시는 자에게 가능성이 가장 없고 자격이 가정 없어 보이는 자에게 번번이 은혜를 베푸신다.(*) 글쓴 이 / 아더 월킹톤 핑크(Arthur Walkington Pink, 1886-1952)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요단출판사, 2014.

A.W. 핑크에 대해

아더 월킹톤 핑크(Arthur Walkington Pink, 1886-1952)는 칼빈주의와 청교도 사상에 기초한 유명한 전도자요 성경학자이다. 1886변 4월 1일 잉글랜드(England) 노팅엄(Nottingham)에서 독실한 크리스천 부모의 세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핑크가 태어날 무렵 산업혁명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듬해 대영제국(the United Kingdom)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 1837-1901 재위)은 즉위 50주년을 맞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은 사회, 경제,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으며 기독교 신앙과 도덕이 문화를 지배했다. 이 시대를 되돌아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너무나 편한 시대였다.

그 결과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그릇된 풍조와 영향력이 이 시대에 많이 생겨나거나 강화되었다. 그중에 신학의 고등비평과 과학의 자연주의 및 다윈의 진화론이었으며,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 같은 강력한 기독교 이단도 이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 번성했으나 영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부모의 훌륭한 인품과 신앙과 모범에도 불구하고 핑크 집안의 세 자녀는 어린 시절 신앙을 등졌다. 아더 핑크는 청년 시절에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 빠졌다. 신지학이란 모든 종교는 ‘영단’(Spiritual Hierarchy)을 통해 인간이 보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도우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각 종교는 어느 정도 진리를 내포한다고 주장하는 밀교(密敎, 비밀 사이비 종교, cult)였다.  

그 시대의 유력한 반기독교 운동이었던 신지학을 영국에 처음 들여와 시작한 사람은 애니 베선트(Annie Besant, 1847-1922)였는데 그녀도 핑크처럼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에 대한 반감에서 신지학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핑크는 이 밀교에서 집회 강사가 되었다. 그는 떠오르는 별이었다. 흥미롭게도 핑크가 신지학에서 끌린 부분은 신지학과 강신술(降神術, spiritism)의 관계였는데 신지학의 핵심 신앙은 표면적으로 강신술 곧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을 통해 검증되었다. 사실 신지학의 큰 매력은 강령회(降靈會, seances), 비밀 지식, 마술 치료, 투시력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지학에 몰입했던 핑크는 1908년에 갑자기신지학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2세였다. 핑크가 기독교를 떠나 있을 때도 부모의 기도와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밤 핑크가 신지학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아버지가 그에게 성경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핑크는 이 구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결국 방에서 사흘간 하나님과 씨름한 끝에 놀랍게 회심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인정했듯이 핑크는 내적 갈망이나 공허감을 느껴 회심에 이른 게 아니었다. 그에게 회심은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사실 핑크는 강신술(降神術)의 체험이 속임수가 아니라 귀신들이 죽은 사람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평생 확신했다. 핑크가 신지학을 공개적으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핑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철주야(不撤晝夜) 연구했으며 곧바로 목회의 소명을 느꼈다. 

아더 핑크의 전기 작가 이안 머레이(Iain Hamish Murray, 1931)는 회심한 핑크의 말씀 연구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러한 영적 위기가 지나가고 2년간 아더 핑크는 매일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 아더 핑크가 침실에서 펴는 책은 성경이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열 장씩 읽었으며 특히 한 부분을 깊이 연구했다. 게다가 매일 한 절을 뽑아 묵상하고 종이에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그것을 보며 그 구절의 영적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구절을 마음에 새겼다. 그는 이 방법을 사람들에게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때일 이렇게 한 구절씩 써서 전차에서 외웠더니 에베소서 전체를 다 외웠습니다.” 그는 일이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새로운 기쁨에 젖었다. 

핑크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며 성경을 연구했다. 그러다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잠시 공부한 후 1910년 콜로라도 실버톤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2년간 목회를 했다. 그 후 핑크는 캘리포니아, 겐터키, 사우스 캐로라이나 등 여러 교회 목회했으며 순회 성경교사로도 사역했다. 그리고 1916년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Vera E. Russell)과 결혼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호주에서 두 교회를 목회하다가 1929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2년 아더 핑크는 월간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창간했다. 순전히 성경해석이 중심을 이루는 이 잡지는 전 세계 영어권 그리스도인들에게 배부되었다. 아더 핑크의 초기 저작들은 대부분 이 ‘성경 연구’를 통해 나왔으나 잡지는 1,000부 정도만 발행되었다. 핑크의 저작을 통해 독자들은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이후 거의 듣지 못한 복음서 해석을 다시 듣게 되었다. 당시 그의 잡지는 발행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더 핑크의 저작은 강해설교와 성경적 삶의 회복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34년 핑크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집필 사역에만 전념했다. 자료의 기록을 보면 아더 핑크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사실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인정받지도 못한 게 분명하다. 그는 혼자 성경을 연구하면서 현대 복음주의의 많은 부분들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Arthur and Vera Pink in Sydney, July 28 1924

그 당시 교회는 청교도와 개혁주의 저서를 전반적으로 경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핑크는 청교도와 개혁주의의 대다수 원리를 지칠 줄 모르게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영국은 영적으로 점점 쇠퇴해갔다. 핑크가 보기에 이것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상처도 못 내고 거듭남을 통해 치료도 못하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어떤 복음’(a gospel) 확산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성경 전체에 능통했던 핑크는 성경의 주된 주제인 은혜(恩惠), 칭의(稱義), 성화(聖化) 등을 빼놓지 않고 다루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진리를 지속적으로 조명했으며 우리 세대는 이 부분에서 그에게 큰  빚을 졌다.아더 핑크는 1952년 7월 15일 스코틀랜드 스토느웨이에서 빈혈로 숨을 거두었다. 핑크가 죽은 후 그의 저작은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Trust)을 통해 재출판 되었고 그 결과 훨씬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였다. 이안 머레이가 말했듯이 “그가 죽은 후 그의 책이 널리 보급되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 저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저작은 강해설교의 부활에 불씨가 되었고 독자의 마음을 성경적인 삶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더 핑크는 대부분의 인명사전에 빠져 있고 많은 기독교 역사책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