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0)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0)
< 1부 > 개혁신앙의 원리들
1.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2. 하나님 중심의 원리
3.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
4. 신자의 삶 강조의 원리
< 2부 > 개혁신앙의 핵심교리들
A. 성경론(계시론)
B. 신론(神論)
C. 인간론(人間論)
C. 인간론(人間論) (1)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이해는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이며, 둘째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 한 이후의 인류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인류의 모습인 것이다.
1. 에덴동산의 최초 인간

하나님의 은총과 복(福) 안에서의 인간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최초 인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축복의 삶이 소개된다. 창세기 1:28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인간들에게도 하나님과 같이 창조의 특권을 맛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의 창조는 아니지만 인간도 자신과 같은 모습의 존재를 잉태하고 낳아 기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창세기 1:29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채소와 과실을 식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된 사실을(창 3:17) 고려해 볼 때 창세기 1장에서의 상황은 심판의 노동이 아닌 즐거운 근로를 통한 식물의 획득이고,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의 선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창세기 2:3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일의 복을 주셨다. 6일 간의 성실한 근로의 시간을 마친 후 한 주에 하루씩은 육체적으로도 안식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경배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영적 안식의 날을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복 된 배려일 것이다.

창세기 2:8-15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주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터로 허락하셨다. 좋은 환경에서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창세기 2:16,17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예외가 있는 자유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예외규정으로 주어졌다. 여기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는 세속적인 자유와는 다른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자유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자유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유이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자유란 사실상 방종이며,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한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의 자유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참 자유며 인간이 참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주는 자유인 것이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셨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교제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삼위 간에 서로 교제하며 존재하시듯이 서로 관계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2. 인류의 대표 아담의 타락과 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셨던 크고도 많은 이 같은 복들을 최초의 인류는 잘 소화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어기고 타락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1) 아담의 타락의 배경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즉 모든 만물들은 선하게 지음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이후부터 인간의 타락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 사이 기간에 천사의 타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까지의 내용 속에서 천사들의 타락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인간의 타락이 제시되는 창세기 3장에서는 이미 타락한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바로 그 타락한 천사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러한 사탄의 존재가 아담의 타락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도덕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타락한 사탄의 존재와 그의 유혹이 아담의 타락의 배경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담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정으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탄의 말을 따랐고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 범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범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2) 아담의 타락사건에서 사탄의 전략

아담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범죄 하였으나 그러한 결정을 하기까지 사탄은 치밀하게 그 타락의 길을 준비하여 접근했었다고 볼 수 있다.

– 의심을 불러일으킨 단계(창 3:1)

사탄은 하와에게 접근할 때 처음부터 강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어봄으로서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 먹되 한 가지 나무의 실과만을 금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질문을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들을 먹지 말라고 하시는 옹졸한 신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처럼 사탄의 질문은 마치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너그럽지 못한 신으로 오해하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했던 것이다.

– 노골적인 거짓말(창 3:4)

일차적인 접근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하와에게 사탄은 좀 더 노골적인 거짓말로 접근했다. 어쩌면 하와의 마음속에서 싹트게 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대한 의심을 사탄은 파악했을 것이다. 이제 흔들리기 시작한 하와의 마음속에 사탄은 좀 더 강력한 불신을 불어넣으려 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사탄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어서 ‘정녕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信實性)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을 한 것이다.

하와는 이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을 고쳐먹고 사탄의 유혹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하와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훈련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나 결국 사탄의 거짓 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 외적인 유혹(창 3:6)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마음을 가진 하와에게 사탄은 그 유혹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다. 사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즉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는 왠지 더욱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 사탄의 말을 더욱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로써 사탄은 최초의 인류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고 인류는 그 이후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운명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 아담의 타락하여 범죄 한 결과는 죽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육체적인 생애를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향해가는 인생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의 모습을 성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준다.

죄의식 /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에게 찾아온 첫 번째 현상은 죄의식에 사로잡인 삶이었다.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느끼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전락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벌써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구체적인 책망으로 꾸짖지 않았어도 그들은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두려움(Awesome)이 아니라 범죄 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게 되는 공포의 두려움(Fear)이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는 마음 저변 깊숙이에서 그러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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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세계관 : 창조 -> 타락 -> 구속 -> 완성

 

사회적 불화와 갈등의 삶(창 3:11-13) /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에게 그것은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갈등으로 표출되어갔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라고 물어보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다. 인류 최초의 가정불화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와를 문책하시자 하와도 또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도리어 뱀이 꾀므로 내가 먹게 되었다고 변명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의 관계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왜곡될 때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체적임 심판(창 3:14-19) /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권세의 간접적인 그림자 외에도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인생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구체적인 심판으로 알려주셨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를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그리고 인간은 결국에는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한 죽음은 영적 죽음과 육적 죽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로마서 3:10-12에서 영적 죽음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그것은 타락 후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의(義)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 한다.(10절) 물론 이 세상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또 덕망 있는 인격자로 살아갈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어떠한 의(義)도 소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둘째, 지적인 영역에서도 인간들은 불구가 되고 말았다. 본문이 ‘깨닫는 자도 없고’라고 표현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 지적 활동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그 의미는 하나님과의 영적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있어서 그들의 지적인 활동은 전혀 무능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noetic effect of sin)
셋째, 타락한 인간은 의지적인 영역에서도 불구가 되었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이 이끌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라도 스스로 주께로 나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요 6:65)

이처럼 육신적으로는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의 인생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아담에게 즉시 찾아오지는 않았다. 선악과를 먹는 즉시 죽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차원의 인생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가 죽음을 맞았고 그의 모든 후손들도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죽게 되었다.(롬 5:12)

결국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이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인생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정녕 죽을 수밖에 없게 된 ‘허무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창세기 3:15에서의 원시복음의 내용과 같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실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인류의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글쓴 이 /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