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일반성도들을 위한 성경해석의 기본원칙 

PART Ⅱ

오늘은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자 한다. 이 강의는 성경해석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아니고 일반성도가 반드시 알아야 할 성경해석의 기초원리로서 기본원칙만 다룬다.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이 정확 무오(無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런데 같은 성경 본문을 놓고도 성경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혼란이 오고 논쟁이 악화되고 심한 경우는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교리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은 올바른 성경해석이 어떤 것인지 성경해석의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말하려고 한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해석에 있어 첫째 되는 절대조건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로 판단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판단하고 다 이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지식과 지혜가 제한된 인간이 지식과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죄로 인해 타락한 인성을 가진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실 수 할 수가 없고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로 인간이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의 머리와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판단할 수 없다. 누구도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성경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판단하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거룩함이 하나님보다 앞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어떤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성경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란 말이 헬라어 원문에는 ‘theopneustos’라는 한 단어인데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으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기록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또 “성경은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기록했다.”(벧후 1:21)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성경도 다른 수많은 종교의 경전과 같이 어떤 철학자가 도덕이나 윤리를 전할 목적으로 좋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결코 그런 철학자들이 인생의 도덕이나 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기록된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그들 경전과는 기록목적이 전혀 다르다. 성경기록자들은 자기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성경 밖에서 입증하려는 사람은 분명한 성경자체의 증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불완전한 인간의 힘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증하고 싶어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을 단행한 루터(Martin Luther)는 이것을 ‘Theology of Glory’라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내어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을 말한다.  

신학자를 보는 루터의 관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Theology of Cross’이고 또 다른 하나는 ‘Theology of Glory’였다. ‘Theology of Cross’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주님에게 굴복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태도이고 ‘Theology of Glory’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가로채려는 자들이다. 루터가 보면 오늘 기독교계는 대부분 ‘Theology of Glory’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내세우기를 좋아하는가!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는 무엇인가?

그러면 성경 이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들은 주로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존한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1878년에 발견된 것으로서 ‘나사렛포고령’(Nazareth Decree)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육적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으며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믿는 유대인들 간에 충돌로 시끄러워지자 당시 클라우디우스(Claudius, BC10-AD54)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했다.

Nazareth Decree

그런데 ‘나사렛포고령’이라는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명령한 칙령으로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손대지 말며 만일 이런 무덤을 훼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는 일종의 묘지법이다. 사방 일 피트(foot)의 흰 대리석으로 된 이 원본은 지금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은 지금 이스라엘 북방 지중해 해변 가이사랴에 가면 바울이 벨릭스 각하에게 재판받던 원형극장이 있는데 그 원형극장 바로 앞에 갈색으로된 모조품(replica) 이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고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고고학적 문헌은 1976년 발견된 ‘에블라 문헌’(Ebla Tablets)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금의 수리아 하맛(Hammath)이라는 곳의 높은 언덕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2천 Nazareth Decree 여 년 전에 창성했던 ‘에블라’(Ebla) 왕국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던 17,000장의 토판인데 이태리 로마대학의 페티나토(Giovanni Pettinato) 교수가 판독한 바에 따르면 이 문헌 중에는 에불라 왕국과 소돔과 고모라 성이 교역하던 내용의 문서들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름도 나오고 살렘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실제 역사에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던 곳이 아니고 가상 도시였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문헌의 발견으로 성경의 진리가 다시 한 번 입증되어졌다.

한 가지 더 말하면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들 중에는 헷 족속(Hittites)의 유적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헷 족속은 실제로 존재하던 부족이 아니고 가상적인 부족이 라고 믿고 있었다. 독일 신문기자였던 켈러(Werner Keller)라는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0년 고고학 발굴 취재를 위해 발굴 팀을 따라갔다가 헷 족속의 근거지를 발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책을 썼다. 그 책의 이름이 ‘역사로서의 성경’(Die Bibel als History)이라는 책이다. 미국 뉴욕의 모로출판사(William Morrow Co)에서 1950년 초에 영문으로 번역하여 ‘역사로서의 성경’(The Bible as History)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 서문에서 저자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아무리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이 지금도 내 귀속에 방망이질 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지만 성경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를 놓아두고 다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죄악 된 인간의 심리이며 루터가 말하는 ‘Theology of Glory’ ‘Vain glory’ 심리에 기인 한다.  

성경은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발트(Karl Barth)가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말씀이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발트는 말하기를 “그 말씀(성경)은 내가 이성(理性)으로 받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받아 드리건 말건 성경은 객관적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발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건 말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각자의 죄의 성향은 없이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성격과 학식과 언어와 문화적 배경 취미 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기계적인 영감’을 주장하면서 성경기록자들은 마치 로봇처럼 아무 생각도 없었고 하나님이 불러 주는 대로 적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 된 주장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문체(Literary style)가 왜 모두 서로 다른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단하고 단문이나 중문이 많고 복문은 적다. 반면 누가복음은 복문이 많고 단어도 어려운 단어가 많다. 구약도 이사야서의 문체와 에스더서의 문체가 다르다. ‘기계적인 영감’으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유기적인 영감’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또 성경은 40명 이상의 서로 시대가 다르고 학식과 성격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1500여 년에 걸쳐 기록했는데 내용은 모두 한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준다. 세상에 많은 종교 중에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 주는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 없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파생했지만 유대교는 기독교를 배척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다 그들의 성경은 타나크(תנ״ך, Tanakh)라고 해서 구약의 39권을 22권으로 나눈 구약만 있다. 성경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말씀이다.

신구약 66권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일관성(cohesiveness)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Augutine)이 말한 “신약을 모르면 구약을 알 수 없고 구약을 모르면 신약을 알 수 없다.”)는 말이 맞는다. 간혹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므로 신약이 완성된 후부터는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 된 것이다.  

가령 구약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구약 신명기 21:23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고 신약 갈라디아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이며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과 같다. 그러므로 구약을 모르고 어찌 신약의 세례와 성찬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특히 마태복음에 인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면서 요한복음 5:46에 ‘모세가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모세가 전한 증거를 알아야 하고 모세를 안다는 말은 구약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거나 지금은 신약이 완성되었으니 구약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0:11이나 로마서 15:4에 보면 “전에 가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구약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절대로 버릴 수 없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둘 다 꼭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구약은 ‘언약의 약속’이고 신약은 ‘언약의 성취’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이다. 마치 방안에 불이 켜질 때 점점 밝게 켜지도록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한꺼번에 모두 주신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셨다.

야곱이나 다윗에게는 부인이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에베소서 5:22 이하에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길

이혼도 마찬가지이다. 신명기 24:1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9:8에 “이전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악하여 임시로 허락했던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는 비늘이 없는 고기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먹는 음식에 그런 제한이 없어졌다. 골로새서 2:16-18에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구약의 의식법(儀式法)을 모두 이루시고 철폐하셨기 때문이다.  

3. 올바성경해법은 무엇인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이시고 디모데후서 3:16 말씀대로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지만 그 기록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신학자 리차드 롯(Richard Rothe)은 성경의 언어는 이상해서 어느 헬라의 학자의 언어와도 다른 이상한 말이기 때문에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는 말’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히브리어(Hebrew)로 대부분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이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는 모두 헬라어(Greek)로 기록되었다.

헬라어는 고전적 헬라어와 평민의 헬라어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현대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나 플라토(Plato)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쓰던 고전 헬라어(Classic Greek)가 아니라 시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던 헬라어(Koine Greek or Hellenistic Greek)로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할 때 기록 방법은 어떠했을까? 성경기록자들은 누가(Luke)를 제외하고 모두 유대인(Jews)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언어, 어법, 관습, 속담, 사고방식 등이 성경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해석을 할 때 만일 이것을 무시하면 성경해석에 이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 12:20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그리하므로 그의 머리에 산 숯불을 얹으리라.”라고 했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산 사람의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얹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나라에도 속담이 있다. 즉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후히 대하라.”라는 말을 유대인들은 “저 사람 머리위에 산 숯불을 얹어 주어라”라는 식으로 표현 한다. 또한 마태복음 24:28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 떼가 모일 지니라.”라는 말씀도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란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언어에는 수사학(修辭學) 이라는 것이 있는데 직유법, 은유법, 영상법(映像法, method of images) 등이 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병아리 나래 아래 품듯’ 이런 말들은 직유법이고 누가복음 13:32에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하거나 요한복음 1:29에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표현은 은유법이다. 또 성경에는 다른 문학서처럼 영상법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 많이 나온다. 가령 바다에서 올라오는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인 짐승’같은 것은 사탄이 악함을 나타내 주는 영상표현법이다.(계 13:1) 144,000 같은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로 ‘구원 얻은 자 전체’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런 일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붉은 말’은 소련이고 ‘흰말’은 미국이라고 해석 하는 따위는 성경해석을 그르치는 좋은 예이다. 성경에는 성경해석의 원칙이 있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결과가 된다.  

(1)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 된 이유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모든 언어 중에서 헬라어는 가장 문법이 정확하고 바른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에베소서 2:8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대목에서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말은 ‘완료형 남성 주격 복수 분사’로 사용되었으니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의 구원교리가 입증된다. 또한 요한일서 3:9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란 대목에서 ‘죄를 짓지 아니 한다’는 말은 ‘직설법 현재 삼인칭 단수 동사’이므로 “하나님에게로 난자는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문법적 설명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함부로 짓지 않는다는 교리가 입증된다.

(2) 본문의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성경해석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해석 방법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Historico, Grammatico, Theological Interpretation) 해석이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항상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Origen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 185-254))은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에 물든 신학자였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은 4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풍자적 의미’, ‘신학적 의미’이다 이것을 오리겐의 ‘사중 성경 해석법’(Origen’s Quadrupl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오리겐(Origen)은 이렇게 누가복음 10장을 해석하면서 1)문자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고, 2)도덕적 해석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3)퐁유적 해석은 방금 위에서 말한 대로고, 4)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런 성경해석 방법을 지금도 소위 영해(靈解)라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어느 성경구절이든 그 성경본문 해석은 단지 한 가지 뜻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 한 구절을 놓고 자기 생각이나 입장을 따라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식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누가 하나의 성경본문을 놓고 한 가지 이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해석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 본문의 문맥을 중요시 하는 성경해석

우리가 성경해석을 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있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구절이 있다. 일률적으로 모든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거나 상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가령 요한복음 2:19,20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46년간 지은 성전 건물을 사흘 만에 주님이 다시 짓겠다는 말씀인가? 아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읽어보면 성전은 주님이 그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임이 드러난다. 즉 주님의 몸이 죽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의 ‘1260일’, ‘42달’, ‘한 때와 두 때 반’이라는 말씀도 모두 상징적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반드시 다니엘 9:27과 병행해서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0:1-7 사이에 6번 나오는 ‘천년’이라는 말은 문자적인가 아니면 상징적인가? 문자적이라면 성경이 기록 된지 벌써 1,000년이 넘었으니 문자적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숫자가 상징적인 것을 안다. ‘말세’란 히브리 1:1, 베드로전서 1:5, 1:20 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의 천년은 문자적 천년이 아니고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전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혹은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3:29에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는 말씀에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부흥사들 중에는 이 구절을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심지어 ‘성령 훼방(모독) 죄’를 ‘방언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다. 이는 성경해석의 기본지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문제의 성경구절 앞뒤 문맥(context)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가 행한 기적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사탄의 이름중 하나)의 힘을 빌려서 행한 것다.”라고 비난했다. 이때 예수께서 29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해석을 믿기 어려우면 성경 마가복음 3:29 그 다음절 30절을 보면 의미가 아주 분명해 진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저가 더러운 귀신이 들였다 함이라.”고 스스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같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라. 지금 내가 연구하는 구절이 왜 기록되었는지 앞뒤를 읽으면서 문맥을 잡아라.

이같이 성경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영어로는 “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라고 한다. “문맥을 보지 않고 해석하면 궤변이 된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가? 우리 주변의 사이비 목사들을 보라!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너희 중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 라도 실족케 하면 큰 연자 돌을 목에 달고 깊은 물에 빠져 죽은 편이 낫다.”(마 18:6)고 엄히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4) 본문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성경해석

앞서 올바른 성경해석의 원칙으로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 방법을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방법이다.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 어떤 시대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 성경구절이 기록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할레이(Halley)의 ‘성경 핸드북’이나 핸드릭슨(Hendrickson)이 쓴 ‘성경개관’(Bible Survey)이 좋고 성경의 배경을 다룬 참고서들을 읽어보면 좋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계속 주의 깊게 읽어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책의 처음부터 다시 읽어라.

그래서 “마가복음은 어떤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는가? 하박국서나 학개서는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가?” 등을 연구한다. 마가는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했는데  섬기는 종 되신 예수님을 가장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기록했다. 학개서는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 수축을 등한히 하고 자기 집만 열심히 수리하는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학개 선지를 통해 성전 수축을 명하는 배경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는 잘 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결국은 아무리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며 감사 한다.”는 내용을 알아 두어야 한다.  

(5) 본문의 언어적, 문법적 특성을 살리는 성경해석

The Various Contexts of Any Passage

성경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안 후 다음은 골치 아픈(?) 문법적인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이 일반성도로서는 어렵다. 이유는 원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원어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코피를 쏟아가며 매일 그 어려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한다. 그러나 일반성도도 열심만 있다면 집에서 능히 헬라어를 자습할 수 있다. 프린스톤(Princeton)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73) 박사가 쓴 ‘신약헬라어 입문’ 같은 책을 사서 스스로 매일 조금씩 헬라어를 터득해 갈 수 있다.  

구약의 히브리어도 공부해야 하지만 히브리어는 그 언어의 체계가 헬라어와는 전혀 다른 어족(語族) 인 ‘셈어족’(Semitic Language)에 속하여 일반성도가 공부하기는 심히 어려울 것이고 헬라어만 공부해 두어도 구약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 둔 칠십인역(七十人譯, LXX)이라는 성경이 있으니 헬라어로 읽으면 신학공부를 부실하게 마친 웬만한 목사 보다 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문법적인 해석의 좋은 예는 요한복음 3:16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믿으면’이라고 해석하지만 문법적으로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원문은 ‘믿고 있는 모든 사람’ 은 즉 ‘everyone believing in Him’의 의미이다. 요한일서 3:9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죄를 도무지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의미로 헬라어 문법에서 ‘직설법 현재형으로 부정문’이니 “상습적으로 무엇을 계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에베소서 2:8에서도 “구원을 얻었나니”에서도 ‘완료형 분사’이므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는 뜻이 헬라어 완료형 성격에서 입증된다.

성경본문의 신학적 해석은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보아서 신학적으로 이 말이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가를 연구한다. 가령 요한복음 3:16을 보면 처음에 ‘사랑하사’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에서 ‘사랑’의 개념이 앞선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부분은 ‘주사, 아들을’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구속은 아들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안다. 또 다른 성경구절을 통해 믿음이란 우리 스스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므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는 뜻이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장 기본교리’를 터득할 수 있다.

4. 피해야 할 잘못 된 성경해석 방법은 어떤 것인가?

(1) 특별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이다.  

성경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 꿈, 환상, 예언 등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그러나 히브리 1:1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보면 그런 방법이 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제는 끝났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을 ‘계시의 종결’이라고 한다. 개혁주의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이 옛날 성경기록 당시처럼 그렇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기록된 말씀만 가지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골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쳤다. ‘오직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신다.(요 15:26) ‘오직 성경’이란 말 가운데는 ‘성경의 충족성’(Sufficiency of the Bible)도 들어 있다.

(2) 성경에 나오는 이적이나 기적을 모방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기록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초자연적 이적이나 기적을 모방하려한다. 가령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않고 3개월 동안 놓아두고 살아나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한다든지, 병든 자를 고치기위해서 약을 쓰거나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일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이다.

예수님을 모방한다고 잘못하는 교회에 들어가 채찍을 사람들을 때려 내 쫓고 강대상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다. 주님이 했다고 해서 우리도 다 그렇게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은 잘못 된 질문이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가 하신 일을 우리가 모두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항상 구원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의 기적은 구원의 성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3) 이상한 수단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하려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Scripture is interpreted by Scripture) 그러므로 ‘환상’이나 ‘추측’이나 ‘자기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성경의 의미는 시종 성경 자체에서 그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성경구절에 비추어 해석한다. 이것이 올바른 개혁주의 성경해석 방법이다.성경해석이나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해서 절대시 하는 것은 가장 위험하다. 경험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개인의 경험이나 추측에 의존하여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부디 우리 모두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말씀을 전하여 이다음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책망 받지 않도록 하자.(*) 글쓴 이 / (고) 김명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