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0) 부활과 영생이 주는 유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0)
부활과 영생이 주는 유익

성도들에게 영광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는 주님의 빈 무덤
성도들에게 영광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는 주님의 빈 무덤

제 22 주일(문 57,58)

요절 : 기록 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 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문 57 : ‘몸의 부활’이 당신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되고 또한 나의 이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켜져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화로우신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문 58 :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 내가 이미 지금 영원한 즐거움을 마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것처럼 이 생명이 끝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얻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 양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항과 58항에서는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즉 영생에 관하여 공부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사도신경에서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중요한 교리이다.

1. 성령 하나님의 사역들

또한 이 두 가지 주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도는 ‘거룩한 교회’, ‘성도의 교제’, ‘사죄’, ‘부활’, ‘영생’을 모두 고백하고 이 모든 교리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고 또 고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사죄(謝罪)’는 보편적 교회에서 행하는 ‘말씀 선포’와 절대적인 관련이 있으며, ‘죄 사함(赦罪)’은 ‘육신의 부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영생’은 이 ‘몸의 부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장차 가야할 그 영원한 나라에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자 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에 성도는 마땅히 교회를 통하여 전달받은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거듭난 자이어야만 하며 그렇게 죄의 문제가 해결된 자는 부활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가게 됨을 확신하고 죄와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고백의 순서는 매우 중요하며 고백할 때 마다 이 점을 숙지하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2. 죽 음

먼저 육신의 부활을 논하는 질문 57에서는 신자의 죽음에 대하여 말한 후에 부활을 논하고 있다. 장차 성도의 몸에 나타날 변화에는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첫째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이렇게 분리된 육체는 땅에 묻히게 되고 영혼은 분리 되어 즉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리워 진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영혼과 다시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영성체로 변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죽음으로 분리된 영혼과 육체는 주의 재림 시 다시 결합하여 영화롭게 될 것이다. 모든 성도는 바로 이 점을 고백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면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1) 죽음 즉시 영혼은 주께로 옮겨진다.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 무엇인지? 죽은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지 등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선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한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하셨다. 아마도 강도가 기대한 바는 먼 훗날 자신의 생명에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 청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당장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답하셨다.

또한 거지 나사로의 경우도 좋은 답변이 될 수 있다. 거지 나사로는 죽은 다음 낙원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나 악한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다. 성경은 분명하게 죽음과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로써 성도와 불신자가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 다름을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죽은 후 육신은 땅에 묻히게 되나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신자는 죽은 다음에 ‘그의 영혼이 올려 져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죄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주님과 함께 쉰다는 차원에서 이 세상에서의 쉼보다 차원이 다른 쉼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성도의 죽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복된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즉 죽음은 ‘자는 것’이며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는 것’이기에 복된 것이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시 116:15)

그 예로 사도 바울도 자신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리지만 영혼은 더 나은 것 즉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그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을 얻게 되기에’ 유익하다고 한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1-23)

물론 신실한 성도는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하며 죽을 때도 또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눈을 감는다. 그리하여 성도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는 고백 즉 ‘주님과 함께 산다.’는 고백 속에서 산다. 아니 오히려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소원하며 살아간다.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 속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라고 말하며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라고 고백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a)라고 사도 요한에게 기록할 것을 명하셨다. 실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그 영혼이 더 가까이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기에 복된 것이다.

(3) 불신자의 죽음

그러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어떤가? 히브리서 기자는 불신자들에 대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히 2:15)이라고 하며 그들의 일생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사로잡힌 종들로 그 공포를 이기려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아무리 건강하고 돈을 쌓고 명예를 얻고 살아도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써도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이처럼 죽음은 신자나 불신자나 차별이 없고 예외가 없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는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 같은 불신자와 달리 사나 죽으나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항상 더 나은 그 본향을 바라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결한 삶을 힘쓰며 그 날의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

3. 부 활

성도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육신과 분리되어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들어 올려 지게 된다.

(1) 중간 단계

그런데 아직 부활의 몸을 입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 단계를 ‘중간 단계’라 부른다. 이 용어는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연옥(Purgatory, 煉獄) 즉 사람이 죽어 영혼이 머무는 곳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다. 이는 이미 죽어서 육과 몸이 분리되어 있는 아직 부활의 몸을 입지 않은 상태로 주께서 재림하시기까지 기다리는 상태를 말한다.

성경에 중간단계에 대한 정확한 말씀은 없다. 그러나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 육체가 부활체로 변화되고(참고, 고전 15:20-23) 그 영혼이 결합되어 새로운 살아 있는 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령한 몸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완성해 주시는 구원이며 성도가 예수와 함께 누릴 영생의 모습이다.

(2) 영과 육의 영광된 결합

어떻게 이러한 부활이 일어날 수 있는가? 구약의 성도 욥은 비록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듣지 못하고 또한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라고 고백했다.

구약의 성도가 이렇게 고백을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은 더욱 더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맞이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을 고백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부활의 능력과 은총을 고백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또한 부활장인 고전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성도 역시 부활할 것을 이렇게 강력하게 전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그렇다. 주님 재림하실 때 성도의 몸은 다시 영혼과 재결합하게 되며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다. 성도의 몸은 이런 차원에서 성령님이 거주하시는 곳이며(고전 3:16)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거룩한 전이다.(고전 6:15-20) 그러기에 거룩한 성전으로써의 우리의 몸은 장차 부활할 몸이기에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리하여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장차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완성하여 주실 것이며 이는 몸과 영혼이 다시금 결합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적합한 존재가 되어 신령함과 거룩함으로 옷 입고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4. 영생과 구원의 완성

그러면 몸과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결합되어 영광스러운 그 나라에 가게 되는 그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성경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한다.

(1) 영 생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이다.(요 17:3)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살았으나 죽은 존재요 영생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 영생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 있으면서 교제를 나누는 성도는 죽어서 그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된다. 즉 영생은 부활의 몸으로 계속하여 누릴 영광스러운 교제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낮은 몸이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때 주어지게 되는 특권으로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게 될 것이며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며 주어진 특권 즉 찬양과 경배 그리고 통치의 권세를 부여받게 된다.

(2) 찬양과 통치권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 완성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행하게 되는 일이 바로 찬양이다. 즉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다. 이 찬양은 우리가 지어 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완성되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돌려드리게 되는 것이며 칭송인 것이다.

한편 천국에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안식이라 할 때 그저 쉬기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생을 누리게 된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또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계시하시기를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라고 하셨다.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성도들은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또한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그 뜻(창 1:26-28, 문화사명, Culture mandate)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창조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행위를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것’이라고 요리문답을 표현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권세야말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광이요 특권이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일들로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된다.

시편 8편에서는 이러한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노래하기를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 8:4-6)라고 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완성하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지막 날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그 완성된 날 주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는 그 영광을 누리게 되는 날로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맡겨주신 새로운 사명이며 또한 그것은 가장 강력하게 통치권을 행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성도들은 도저히 사람의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또한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복된 상태 즉 지복의 상태(至福, the perfect blessed condition)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성도들에게만 주어질 복인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5. 우리가 장차 갈 영원한 그 나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죽음 이후에 전개될 새로운 나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1-5)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 주실 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어떠한 나라일까? 성경은 그 나라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 3,4)

즉 그 나라는 눈물도 없고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는 그리고 상함도 해됨도 죄도 없는 나라라고 소개한다. 어떤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없는 것만을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 선생의 말씀과 같이 “어머니가 젖먹이에게 말할 때 젖먹이의 수준에 맞추려고 일부러 더듬거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가지고 사람과 더듬거리며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인간이 겨우 알 수 있는 것과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시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표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어떻게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볼 수가 있겠는가? 마음으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영원한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분명한 것은 거기에는 모든 것이 완성되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오직 부활하여 예수와 함께 연합한 자에게만 주어질 영광스러움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부활된 영성체로 예수와 연합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때 우리의 구원은 공동체의 구원으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재통일 되는 것이다.(참고 엡 1:10; 4:6)

그러기에 성령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을 맛본 성도는 이 세상의 덧없는 인생을 하루 속히 벗어나 더 나은 그 나라를 덧입기 위하여 사모하게 될 것이며 그 확신을 말씀 속에서 확인한 성도의 입술에서 항상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결 론

이 땅에 살 때도 소망이 없으면 절망 가운데 낙심하며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로 이 소망을 갖고 살게 하셨다. 그래서 부활과 영생은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으로 이는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할(고전 2:9) 놀라운 것으로 예수 안에서 주어질 부활과 영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주어질 영원하고 복스러운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계시록은 이렇게 주어질 영원한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게 하며 그 곳에서 성도는 예수와 함께 영원히 통치권을 행사하게 될 것을 계시하셨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5,6)(*)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