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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의 성경적 의미

300111. 혼인과 가정에 대한 성경적 고찰

(1) 신적(神的) 제도로서의 가정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혼인과 가정에 대한 중요한 출발점은 인간이 창출해 낸 인간의 제도(human institution)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 주신 신적 제도(divine institution)라는 점이다. 혼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심(God’s idea)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인간을 위해 주신 창조질서이며 인간의 타락 전에 주신 창조명령(creation ordinance)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창세기 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7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남자)이 독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의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시고 이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여 한 몸(henosis 결합, 하나 됨)되게 하시므로 최초의 복된 가정을 세워 주신 것이다.

그런데 가정은 단순히 남편과 아내의 동반자적 생활이나 자녀를 출산하는 생물학적 연대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창조 언약적 관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그 언약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범주 속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그 언약의 사실이 구약의 할례나 신약에서 교회의 유아세례는 바로 가정을 통해 계승되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성의 기초 위에서 시행되는 예식이다.

(2) 가정과 교회의 관계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신적(神的) 제도이다. 성경에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동일한 구조 속에 설명되고 있다. 즉 에베소서 5:22,23에 가정의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즉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신 것이다. 즉 바울은 가정과 교회를 동일한 관계성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엡 5:32) ‘교회를 위하여’라는 미명 하에서 가정이 무시될 수 없고, ‘가정을 위하여’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정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과 교회는 거룩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교회를 위한 의무와 책임을 적절히 수행해야 하며,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내와 남편간의 관계(그리고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엡 6:1-4)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교회는 확대된 가정 가정은 축소된 교회로, 가정 같은 교회 그리고 교회 같은 가정이 가장 성경대로의 이상적인 교회 그리고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성도의 가정을 ‘작은 교회’라고 했다.
(3) 혼인과 가정제도의 성경적 기본지침

1) 일부일처제 원칙(monogamy)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는 창조론에 기초한(마 19:4) 하나님의 창조질서다. 또 이것은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의해 설정된 원리였고(마 19:4-6, 고전 7:10), 이혼과 재혼과 관계된 일련의 성경적 가르침 속에 선명하게 나타난 원리이다. 이 점은 가족과 사회, 국가의 안정은 일부일처제 가정 제도에 달려있다는 현실적 요청보다 더 우선하는 규범적 원리이다.

2) 항구성의 원칙(permanency)

여기서 항구성은 혼인이라는 제도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의 관계가 이 세상사는 동안 항구적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이러므로 사람(남자)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니라.”라는 명령이 4번이나 반복되고 있다.(창 2;24, 마 19:5, 막 10:7,8, 엡 5:31) 이는 인간의 범죄 전후 동일하게 주신 명령이다. 즉 가정 제도는 인간의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인 오늘 우리시대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속적으로 변함없는 제도임을 말한다.

3) 신실성의 원칙(fidelity)

또 성경적 혼인의 기초는 신실성이다. 성경은 부부간의 합당한 도리로 신실성을 강조했고(고전 7:1-5) 이혼에 관한 가르침 속에서도 부부간의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부간의 신실성을 파괴하는 간음을 저주했을 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불의한 것으로 말씀하셨다.(마 5:27 이하) 그러므로 성경적 혼인을 정의하면 “혼인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전 생애를 함께 하기로 한 전인격적이며, 이성적(理性的)인 언약으로서 상호 보완적이며 동반자적 관계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과 가정 제도를 부인하거나 그 신성한 의미를 약화시키는 어떤 이론이나 주장도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2. 혼인과 가정제도의 목적

혼인과 가정 제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오해할 때 혼인의 목적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 제도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알게 될 때에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이해하게 된다. 성경의 혼인에 대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들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다.(창 1:18) 혼인은 일차적으로 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하시려는 제도이며 부부간의 사랑의 결합을 통해 자녀 출산의 복을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혼인을 통해 이룩된 가정을 출산을 위한 사랑의 터전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부부간의 아름답고도 정결한 사랑이 발효될 수 있도록 가정을 주셨고, 또 사랑의 열매로 출산의 복을 주신 것이다.

부부의 성(性, sex)은 사랑과 출산을 위해 주신 아름답고도 신성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혼인관계 밖에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경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marriage bed)를 더럽히지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히 13:4)

(2) 동반자적 삶

혼인의 목적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동반자적 삶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a helper suitable for him)을 지으셨다.(창2:18)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인(영적인) 상호사귐과 상호의존과 보완을 위한 상호위탁이었다. 돕는 배필이란 히브리어로는 ‘그 앞에서 돕는 자’라는 뜻이다. 결혼은 인간의 고독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처방이었다.

(3) 경건한 자녀의 양육

출산 명령은 양육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정을 통한 신앙 교육과 영적 양육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즉 성경은 단 한 번도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을 부모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신 6:4-9) 그러므로 자녀 양육과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교회도 국가도 아닌 부모이다. 부모는 신적 권위로 자녀를 지도 감독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선지자적 의무를 다해야 하며, 자녀의 죄를 위해 대신 기도하고 간구하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은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케 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타락과 방종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은 혼인은 하되 자녀는 갖지 않겠다고 한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피조 되었고 모든 실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고려해 볼 때(고전 10:31) 혼인 그리고 가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혼인은 결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이기적 삶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상호의존과 보완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답고도 정결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3. 호세아의 혼인에 나타난 하나님 은혜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림인 혼인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이혼) 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 순결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자들이다. 이것을 성경에 잘 설명하는 곳이 바로 호세아서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음란한 여인 고멜과 혼인하였고 자식을 낳았다. 또 호세아는 창녀 고멜을 다시 자기 아내로 데려 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대가로 지불한다. 이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삼십 세겔이다.(호 3:1-3) 은 삼십 세겔은 출애굽기에 의하면 종의 목숨 값이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 지니라.”(출 21:3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삼십 세겔에 팔리셨다.

우리도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창녀 고멜’과 같은 자들이었다. 이런 우리를 그의 흠 없고 순전한 신부로 만드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와 연합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유권이 하나님께로 넘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시는(dwell in) 처소’로 삼으셨다. 즉 혼인에서처럼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는 말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신부 된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고”(살전 4:3-5)

4. 성경적인 혼인생활을 위해 할 일

(1) 혼인 이전의 생활을 떠나라.

성경적인 혼인생활을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명하신 일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혼인생활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문화와 사회 환경과 관습이 다를지라도 이런 것들과 시대를 초월하여 성경적인 혼인생활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원리는 무엇인가?

첫 번째 원리는 ‘혼인하기 이전의 삶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이 말씀을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 당시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 단 두 사람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하신 것은 이 후로도 있을 모든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 이로 인해 일어나는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고부, 姑婦) 간의 갈등이다. 고부간의 갈등이 부부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부부갈등은 결국 이혼이나 별거와 같은 가정의 해체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가 있었다. 제목이 ‘올가미’라는 것인데 내용은 이렇다.

아들 동우와 30년 동안 단 둘이 살아온 어머니 진숙은 어느 날, 아들 동우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숙은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결국 혼인을 허락한다. 진숙은 동우와 수진을 위해 방을 꾸며두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환대한다. 행복한 혼인 생활을 꿈꾸는 수진, 하지만 남편 동우가 없는 집안에서 진숙과 단 둘이 남게 된 수진은 진숙의 이상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두 사람이 부부생활을 하려는 순간 진숙이 수면제를 핑계로 벌컥 방문을 열기도 하고, 진숙이 미는 바람에 수진은 계단에서 떨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진숙이 알몸의 동우를 목욕시켜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수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수진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진숙의 질투심은 아들 동우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하튼 이런 식의 고부갈등의 핵심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넌 내 아들에게 사준 장난감에 불과해!”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새롭게 가정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장난감을 하나 들여온 것이라는 혼인관이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혼인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해야 하는데 부모를 떠나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결코 성경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혼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떠난다는 것은 나가서 사는 것인가? 반경 1Km 밖에서 사는 것인가? 그런 장소적 의미보다는 떠난다는 것은 독립적이 된다는 것이다. 의존적이 아니고 독립적이 될 때에 비로소 떠나게 된다. 독립적인 판단과 독립적인 결정과 독립적인 선택이 있어야 한다.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아담에게 부모는 누구였나? 하나님이 되신다. 혼인에 있어 하나님은 아담이 부모를 떠나 독립으로 살아가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와가 유혹을 받을 때 그리고 아담이 하와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은 함께 계시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죄였을 지라도 말이다.

(2) 배우자와 연합하라.

이제 혼인을 통해 남자는 부모에게서 떠나고 여자도 부모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함께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들은 두 번째 원리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두 번째 원리는 서로 연합하는 것이다. 부모를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서로 연합하지 않으면 자꾸만 부모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부는 연합해야 한다. 이렇게 연합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진실 된 성경적인 혼인생활을 할 수 있다.

종종 야유회나 운동회 때 하는 2인 3각이라는 게임은 말 그대로 두 사람이 한 발씩 묶고 뛰는 것이다. 그렇게 뛸 때 두 사람 사이의 호흡의 일치가 중요하다. 박자를 잘 맞춰서 뛰어야지 자기가 뛰고 싶은 대로 마음이 급해서 박자를 놓쳐버리면 두 사람 다 제대로 뛸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경주에서 지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화가 나서 한 사람은 가버리기도 하고 별의별 일이 일어난다.

이 2인 3각 게임에서 제일 처음 중요한 것은 발을 잘 묶는 것이다. 줄로 튼튼하게 발을 묶어야지 느슨하게 대충 묶었다가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묶는 줄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여기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런 줄로 묶어야 한다. 또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두 발이 한 발처럼 호흡이 척척 맞을 수 있다. 서로의 걸음걸이가 틀리고 서로의 사고방식이 틀린 상황에서 혼인을 했다. 그것이 중매 이던 연애 이던 소개건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간에 혼인을 했다면 연합해야 한다. 몸만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연합되어야 한다. 연합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그맨 중 이혼위기를 겪었다는 부부가 있다. 처음에는 남편이 더 유명한 개그맨이었고 아내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차 아내가 더 유명해지고 남편은 인기가 시들해져버렸다. 또 몇 년씩 떨어져 산적도 있었다. 여하튼 이혼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물어보니까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어차피 살려면 이겨내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약이 된다. 그 고비만 잘 넘기면 될 것을 그거 못 넘기면 끝나는 거다. 나만 싫어하고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부부는 똑같은 거다. 그래서 평행선이다.”

위기를 넘긴 사람이 한 지혜로운 대답이다. 그 아내는 교회도 다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찾아온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헤어지지 않고 서로 별거하지 않고 이제는 아웅다웅 하면서 함께 연합하고 있다. 그렇게 연합하는 모습이 이제는 좋아 보인다. 서로를 더욱 굳은 줄로 묶었을 때 그들은 더욱 연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부가 연합할 때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비록 인간이었지만 서로의 의지를 꺾고 서로의 감정을 절제하고 서로의 욕구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시련이 없고, 갈등이 없어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고, 시련도 있고, 갈등도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겨내고 극복할 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습’이 그 연합된 삶에 형성되는 것이다.

(3) 배우자와 하나가 되라.

끝으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세 번째 원리는 ‘배우자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한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고 너무나 차이가 있던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한다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연합이 오래 지속되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에베소서 5:31-3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이다.

노부부인 한 성도님 가정은 남편이 85세 부인은 83세이신데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도 하시며 서로 매우 사랑하고 존중하신다. 한번은 부인 권사님이 교회에 집 한 채를 의논 없이 바쳤는데 남편이 화를 낼까봐 매우 걱정을 했다. 그래 기회를 보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 권사님이 “하나님께 드렸으니 우리 아멘 합시다.”하니까 남편이 ‘아멘’하는 것이었다. 그래 권사님이 너무 기뻐 크게 ‘할렐루야!’했더니 남편도 크게 말했다. ‘할렐루야!’

요즘 황혼 이혼이 많은데 서로에게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서로 미워하다가 헤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들은 아직도 마음은 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하튼 아쉽다. 평생 동거동락(同居同樂)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여생을 미움이나 분노가 아닌 사랑과 희락 속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축복된 삶이 될까?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부부가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이 들어도 서로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젊어서 서로를 괴롭히면 나이 들어서도 그럴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혔으면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나이 들어서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경외하면 남편도 아내를 경외한다. 서로 서로 자기 몸처럼 대해야 한다. 하나가 되자!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삶을 살자!

이 세 가지 원리를 잘 기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경적이며 성공적인 혼인생활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부모를 ‘떠나고, 연합하고,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사랑과 희락 속에 거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