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

신앙고백 교육의 중요성

개혁교회 입장에서 본
신앙고백 교육의 중요성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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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즉 교회 는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있는데 이 세속화를 막고 교회의 거룩 성을 회복할 힘이 교회에 없다 는 것이다. 나름대로 각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 보 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 하 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60,70년대는 C.C.C를 중심으로 ‘성경공부’가 유행되어 이 방식을 교회에 도입해 보았지만 교회는 회복 되지 않았다. 70,80년대는 두란노 의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찬양의 열풍과 부흥을 주제로 한 전도 집회가 유행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80,90년대에 와서는 순복음교회를 선두로 한 ‘은사운동’이 전 교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또 미국의 부흥하는 교회를 모방한 프로그램들이 한국 장로교회 안에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그도 별 성과가 없었다. 그 중에 ‘빈야드운동’은 90년대 중반에 엄청난 감동을 주면서 수많은 교회가 따랐지만 종래는 이단운동으로 끝을 맺었다.(통합 측-95년, 합동 측-97년, 고신 측-96년, 이단으로 규정)

그런데도 미국 교회 모방운동은 그치지 않고 90년 후반부터 더욱 큰 영향을 한국 장로교회에 주고 있다. 즉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리닉교회 등 주로 상담과 내적 치유와 같은 심리학을 적용한 프로그램들이 큰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1950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세속화 되어 가고 있고 이 세속화를 막아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아직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가 이처럼 세속화 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새로운 방법만 계속 도입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몇 가지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 원인은 교회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분적이거나 특별한 주제만을 가르치는 데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 내용을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성경의 전체적 중심 주제와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바로 설 수가 없고 쉽게 이단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장로교의 유명한 신학자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은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하여 가르침으로서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 왔다. 개혁교회는 이 방법만이 이단자들을 공격을 막고 성도의 신앙이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대한 분량의 성경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바르고 체계 있게 가르칠 수 있고 또한 성경의 전체 내용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의 전체 중에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며 또 성경 전체를 알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거나 또는 정리해서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초대 교회 사도신경(신앙고백)이다. 이같이 정확하고 바른 신앙고백 없이는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없음을 깨닫고 이후 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고백서를 계속 작성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둘째 원인은 교회가 신조와 신앙고백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는 두 번째 원인은 이것이다. 즉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전체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고백서를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역사적 개혁교회는 이처럼 신조와 신앙고백을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을 바르게 전체적으로 체계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중요한 두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없으며 또한 회복할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런 데도 오늘날 성도들에게 ‘신조와 신앙고백’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면 “뭐 하러 머리 아프게 그 딱딱한 교리를 배우냐?”고 하면서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오늘 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단지 신비한 신앙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능력과 권능으로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신비한 신앙 체험이나 은사중심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또한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가? 아무리 성도 개개인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성경과 교리를 바르게 전체적으로 알지 못할 때는 교회의 세속화는 계속 되고 끊임없이 교회의 침투를 시도하고 있는 이단들과 맞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오늘날 ‘신앙고백서’를 왜 배워야 할 것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가? 또한 신비한 은사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1. 신앙고백서의 근거

신앙고백이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락이며, 개인과 공동체 신앙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신앙고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신앙고백자로 반드시 주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대답 즉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는 오늘날의 정리되고 기록 된 신조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와 같은 그런 형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시편처럼 당시에는 주로 하나님이 명하시고 인간이 이에 대답하는 신앙 고백적 형태로 되어 있다.

(1) 성경적 근거

1) 구약

–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 하여 가로되 “여 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다 행하리이다.”(출 19:7,8)

위의 사건은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께로부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사건이다. 이것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렇게 매우 장엄하고 엄중한 사건에서 ‘신앙고백’의 형태가 제시되고 있다. 위의 내용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 즉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은혜가 주어졌다.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출 19:11)

–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 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 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손과 편 팔과 큰 위 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 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 말씀은 시내 산 사건을 기억하는 모세가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중요성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반드시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은혜임을 믿는 신앙 고백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 여호수아서 24장 전체를 보면 모세의 지도 방법을 그대로 이어 받은 여호수아의 동일한 행동이 소개되고 있다. 즉 가나안 땅을 정복 한 후 이제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모으고 하나 님과 중요한 언약을 맺고 있다. 즉 2절부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전 역사를 소개하고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묻는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그러자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6)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앞에 고백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신앙 고백은 오늘날과 같은 최초의 신앙고백이었다. 그 다음절에 여호수아가 이 신앙 고백을 분명한 증거로 남기기 위해 율법 책에 기록하고 ‘12 돌’을 증거물로 소개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수 24:26)

2) 신약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를 묻고 계시며 또한 그 대답으로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제시되고 있다. 이 고백은 초대 교회가 세례 의식을 행할 때 묻는 전형적인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이것이 후에는 삼위일체의 형태로 자리를 갖추게 된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신앙고백의 기초로서 이 말씀을 핵심적인 말씀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결국 신조의 근거는 여기 야고보의 말처럼 우리의 신앙(믿음)은 반드시 신앙고백 즉 자신의 내적 신앙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행함을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성경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적 근거

위의 여러 성경적 근거 위에 초기 교부시대로부터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된 신앙을 지켜 온 성도들은 늘 ‘신앙고백’을 분명하고 바르게 고백하고 또한 이 신앙 고백의 변질을 막기 위해 문서적인 기록의 형태로도 남겨 놓았다.

특히 16,17세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로마 가톨릭교회에 맞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통해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칼빈의 영향에 힘입어 더욱 체계 있고 정확한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칼빈은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교회 교육의 핵심으로 여겼으며 그 중요성에 대한 표현은 그가 영국의 한 성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리 교육이 없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씨앗이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는 것처럼 교회를 왕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붕괴되지 않고 든든히 서 있을 집(교회)을 짓기 원하신다면 아이들이 아주 인상 깊게 이 신앙 교육서를 통하여 믿음에로 이끌려 지도록 힘쓰고 돌아보십시오.”

칼빈은 또 제네바 국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의서’에서 이 부분을 강력하게 세우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성찬식과 시편을 찬양할 것과 어린이들의 교육에 교리문답서 사용을 요구 하며 교리문답의 중요성 을 언급했다. 그리고 어 린이 교리교육의 중요성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청교도 을 강조한 제 2 차 제네바 교리문답서의 서문도 유명한 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순수함을 보존케 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아이들에게 신앙고백을 가르쳐 저들로 하여금 믿는 내용을 깨닫게 함이 극히 필요하니, 이같이 함으로서 참된 성경 내용이 변질되지 않고 보존될 것이며 또한 각 사람에게 혹은 후손 대대로 전파 될 것이다. 내가 제안하려고 하는 제도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앙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한 요약을 작성하여 모든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일 년의 일정한 날에 목사 앞에 나와 문답을 하고 시험을 받고 또한 각자의 능력을 따라 저들이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정될 때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왔다. 이를 규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문답’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규칙을 사용하였다. 사탄은 자신이 교회를 흩어서 가공할 만한 폐허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안에 아직 어떤 참 신앙의 징표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사탄은 이런 거룩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따라서 사탄이 남겨 놓은 것은 변화 능력이 전혀 없고 단지 미신만을 산출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유물들에 불과하다.(로마 가톨릭) 이것이 바로 왜 현재 우리 교회 안에 내적인 힘은 없고 외적인 종교적 모습만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원인이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 요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는 이처럼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중요성은 칼빈뿐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즉 개혁교회의 신조(신경),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등은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의 고백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진 찬양과 헌신의 의미가 깊이 배어 있는 표현이었다. 또 칼빈이 역설한 교리문답 교육 없이는 결코 오늘까지 기독교가 존속할 수 없었다고 많은 목사들이 증거 할 뿐 아니라, 교회가 교리문답 교육이 없이는 신앙생활의 순결을 지킬 수가 없었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부흥했던 교회도 교리교육을 소흘히 할 때 곧 쇠퇴하고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개혁주의자들이 아닌 다른 분파들은 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개혁교회와 개혁교회가 아닌 교회를 구분 짓는 외적인 큰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구별 방법은 어떻게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역사적으로 늘 동일하게 개혁주의가 아닌 자들은 개혁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공격하고 그 필요성을 부인해 왔다. 즉 영지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우스주의(웨슬레적 감리교, 성결교), 경건주의, 신비주의, 오순절주의(순복음 교회), 현대 자유주의 등이 신앙고백서의 권위와 용도를 전적으로 배격하거나 반대하려고 한다.

그들이 개혁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반대하는 공통적인 이유는 신앙고백서들이 1)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과 신학의 발전을 방해하며, 2)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 권을 방해하고, 3) 위선과 독선과 완고함을 조장하며, 4) 교파 간에 분란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5) 종교적인 증오심과 분파들 간의 험담을 낳게 하며, 6) 역작용을 일으켜 교리적 차별주의나 회의주의 또는 불신앙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단들 역시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을 전적으로 배격한다. 그들은 신앙고백서를 마치 인간의 자유와 권위에 대한 새로운 멍에인 것처럼 여기거나 새로운 형태의 교황주의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순은 그렇게 개혁교회 신앙고백을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들 주장에 맞게 자기들만의 신앙지침을 만들어 그들 전통적 체계나 자기들이 추앙하는 인물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그들 역시 기록이나 문서화된 신앙고백서와 같은 형식의 문건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어느 종교나 신앙고백의 형태는 어쩔 수 없이 본성적으로 필요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신앙고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형태보다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 중 일부는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들을 인정한다고 입으로는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더욱 주의를 요하는 것은 자기들도 개혁교회 신앙고백을 믿으며 정통 장로교회라고 하면서 신앙고백서는 갖고 있지만 명목상으로만 갖고 있을 뿐 실제로는 전혀 가르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데 이것도 신앙고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또한 요즘 장로교 내에서도 ‘성경신학’ 운운하며 목사가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거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많은 장로교회의 성도들이 참된 신앙을 지키려고 갈급해 하면서도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정립하지도 못하고 쉽게 신앙이 변질 되며 이단에 빠지기도 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2. 신조의 필요성

위의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통해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교회가 신조와 신앙고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대답 해야만 하는 필연성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라면 누구나 반드시 하나님께 자신의 신앙고백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 기록 문서로 만들어 지고 점차 후손들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며 가르치기 위해 또 이단의 교회 침투를 막기 위해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1) 신앙고백서는 초대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 들을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특별히 자녀 신앙교육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교리문답 형식의 신앙고백서들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 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요약해 주고, 또한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어 교회의 일치에 가장 큰 역할을 해 왔다.

(2) 신앙고백서는 또한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이단들로부터 지키 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교회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참된 신앙을 어지럽히고 또 변질시키려는 거짓된 이단들이 있었다. 이들로 인해 잘못 된 비(非) 성경적 교리가 만들어 졌고 그 결과 성경해석도 잘못되고 그리고 개인적인 가르침이 난무함에 따라 초대교회는 모든 교회가 함께 모여 이단들의 거짓을 들어내며 성경의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선언할 필요를 느꼈다. 즉 초대교회는 세상이나 유대교나 이단 사상들을 참 교화와 구분하는 것이었으며 후에는 성경의 참된 말씀과 거짓을 가르치는 이단을 구분하고 마침내는 신앙고백서를 인정하는 개혁교회와 인정하지 않는 사이비 기독교를 구별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왜 신앙고백서를 알아야만 되고 또 가르쳐야 만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되어 전체적으로 가르쳐 져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단들도 우리와 꼭 같은 신구약 성경을 믿으며 신앙고백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자기들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을 할 뿐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여 그 참된 진리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또 역사적으로 참된 신앙의 선조들이 작성한 신조와 신앙고백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대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도가 되게 했으며, 성경의 진리를 완벽하고 확실하게 진술함으로써 오류를 막는 방파제가 되게 했으며, 이단들을 막고 성도의 교제와 협력의 기초가 되게 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함께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와 일치되게 성경을 믿는 교회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사, 장로, 집사들을 안수하고 권사를 임명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손을 들고 “나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부지런히 배우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가르치며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 갈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언약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안수 할 때 이런 언약을 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교회의 모든 일 가운데 우선하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참된 신앙의 참된 교회로 다시 회복되고 굳게 서기 위해서는 신조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전 교인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며 배울 것을 결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이 오늘 모든 교회에 주님이 명하시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또한 우리는 이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의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결코 명분에 얽매여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호세아 선지자의 외친 말씀을 들을 때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이렇게 외쳤다. “내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익히고 배우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기억하고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집을 쓰신 한 목사님의 고백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외치기를 ‘하나님이여! 무식 장이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 공부였던 교리문답이 오늘날은 목사를 길러 내는 신학교 과정에서 조차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니 너무나 통탄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출처 / 교회 자료실(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인천 열린문교회, 담임 우선동 목사)